반응형 전체 글18136 잠삼岑參 백설가...白雪歌送武判官歸京(백설가송무판관귀경) 백설가로 서울로 돌아가는 무판관을 전송하며[白雪歌送武判官歸京(백설가송무판관귀경)] [唐] 잠삼(岑參. 715~770) 北風捲地白草折 북쪽 바람 몰아치니 백초가 꺾이고 胡天八月卽飛雪 오랑캐 하늘엔 팔월에도 눈나리네忽如一夜春風來 문득 하룻밤새 봄바람 불어와 千樹萬樹梨花開 천만 그루 배나무 꽃을 피운듯 散入珠簾濕羅幕 어지러이 주렴 들어 장막 적시니 狐裘不煖錦衾薄 갖옷도 따뜻하지 않고 비단이불도 얇네將軍角弓不得控 장군은 각궁 얼어 당길 수도 없고 都護鐵衣冷難着 도호는 쇠갑옷 차가워 입지도 못하네瀚海闌干百丈氷 사막엔 이리저리 백길 얼음 펼쳐지고愁雲慘淡萬里凝 수심어린 구름 구슬피 만리에 서렸네中軍置酒飮歸客 군막에 술상 차려 가는 이 대접하니 胡琴琵琶與羌笛 호금 비파 강적 소리 울려 퍼지네紛紛暮雪下轅門 어지럽게 저물.. 2018. 2. 23. 저 달 보며 당신 생각해요 저 달 보며 당신 그리워하네[望月懷遠·망월회원] [唐] 장구령(張九齡·678~740) 海上生明月 저 바다로 떠오른 밝은 달 天涯共此時 하늘 끝에서도 지금은 같겠죠?情人怨遙夜 그리워하는 이 긴 밤 원망스러워 竟夕起相思 밤새도록 일어나 당신 생각합니다滅燭憐光滿 초를 껐더니 휘영청 달빛 좋고 披衣覺露滋 걸친 옷은 이슬 내려 젖었네요 不堪盈手贈 달빛 손에 채워 보내진 못하니還寢夢佳期 다시 잠들며 당신 만날 꿈 꿉니다 Missing you while looking at the moon [Tang] Zhang Qiaoqing (678 ~ 740) The bright moon rising over the seaIs it the same at the end of the sky? Longing for this long .. 2018. 2. 23. 두복지頭腹智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신라 관료 이름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2018. 2. 23. 지심지只心智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신라 관료 이름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2018. 2. 23. 이부지尒夫智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신라 관료 이름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2018. 2. 23. 자숙지子宿智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신라 관료 이름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2018. 2. 23. 지도로至都盧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갈문왕이다.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서 왕을 ‘이름이 지대로(智大路-지철로智度路라고도 하고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라 하고, 삼국유사 왕력편 지증마립간조에서는 그를 일러 ‘지철로왕(智哲老王)'이라 한다고 해서, 금석문에 보이는 지도로가 곧 지증왕이라 보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 2018. 2. 23. 절거리節居利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말추末鄒와 ○申支 .. 2018. 2. 23. 내지왕(乃智王)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신라 왕이다. 삼국유사 왕력편 눌지마립간조에 이르기를 왕을 ‘내지(內只)라고도 한다(一作內只’라 했으니, 이를 근거로 음이 비슷하다 해서 눌지왕이라고 본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 2018. 2. 23. 유신(庾信) ☞ 김유신(金庾信) 2018. 2. 23. 유신공(庾信公) 김유신(金庾信)을 높여 이르는 말. ☞ 김유신(金庾信) 2018. 2. 23. 흘우(屹于)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3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卒]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10년(서기 37) 겨울 10월에 우보 흘우를 좌보(左輔)로 삼고, 북부의 진회(眞會)를 우보로 삼았다. 21년(서기 48) 3월에 좌보 흘우(屹于)가 죽으니[卒] 왕이 슬피 곡하였다. 2018. 2. 23. 구태(仇台)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2018. 2. 23. 우태(優台)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2018. 2. 23. 연타발(延陀勃)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2018. 2. 23. 마려(馬黎)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즉위년 :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2018. 2. 23. 다루왕(多婁王)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도량이 넓고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온조왕이 재위 28년에 태자로 삼았고, 46년에 이르러 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서기 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2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 4년(서기 31)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에 왕이 횡악(橫岳) 아래에서 사냥하였는데 한 쌍의 사슴을 연달아.. 2018. 2. 23. 구파해(仇頗解)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43년(서기 25)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2018. 2. 23. 해루(解婁)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卒]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2018. 2. 23. 주근周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해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 허리를 베고 그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2018. 2. 23. 소모(素牟)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2018. 2. 23. 이전 1 ··· 841 842 843 844 845 846 847 ··· 86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