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494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1897-1944)의 글씨 아마 근대의 화가 중에서 글씨 잘 쓰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ㅡ 무호 이한복(1897-1944), *** 석수만년石壽萬年이란 돌 같이 만년을 누리라는 뜻이다. 2021. 1. 28. 소나무 아래 달빛으로 만났다가 남북으로 영영 갈린 김기창과 정종여 해방 전 어느 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 문하인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제자인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1914-1984)가 한 자리에 모였다. 스승은 달랐지만 그래도 퍽 가깝게 지냈던 듯싶다. 그 둘이 무슨 연유로 같이 만난 것이다. 이 시절엔 글 좀 하고 그림 그린다 하는 이들이 모이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서 좌장이나 자리를 주선한 이에게 선사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그들 앞에 종이가 놓이자, 청계가 먼저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거친 듯 유연한 나무의 둥치가 멋스러운데, 아래 공간이 비어 있다. 거기 운보가 신선과 동자를 세웠다. 누런 옷의 노인은 저 멀리를 바라보는데, 청의동자는 화폭 바깥을 흘깃 쳐다본다. 다 되.. 2021. 1. 21. 풍곡 성재휴, 깊은 산속 깊은 절 라고 해야 할까? 살아 꿈틀거리는 산줄기가 기와지붕 우뚝한 절을 품었다. 기와도 푸른빛, 절 주변 수풀도 푸른빛, 또아리를 튼 산도 푸른빛이다. 스스럼없는 붓질 몇 번에 기막힌 풍경이 펼쳐진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풍곡豊谷 성재휴成在烋(1915-1996) 화백이다. 대구 출신으로 석재 서병오, 의재 허백련 같은 대가들에게 배우고, 국전에 3회 입선한 뒤 야인으로 지내며 작품활동을 했던 분이다. 파격적인 산수와 쏘가리 그림이 장기였는데, 이 작품도 구도나 색감이 남다른 데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흠이 꽤 많다. 애초 화첩에 그려졌던 그림이라 가운데 선이 가 있는 것이나 바탕이 찢겼던 것은 둘째 치고, 가운데의 그 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작품만의 문제였을지 화첩 전체.. 2021. 1. 19. 너 무슨 의도로 그런 얘기를 하느냐 19세기 문인 홍길주가 남긴 글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어디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니었나 싶다). 고증학에 밝았던 연경재 성해응이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 "평양의 이른바 기자릉은 가짜일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이양천이란 이가 발끈하며 가로되, "우리나라에는 오직 기자 한 분만이 계시거늘, 그대는 이제 그마저 잃어버리게 하려 하는가? 대체 무슨 심산인가?" 성해응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2021. 1. 19.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머물던 곳 존경하는 송혁기 교수님 최근 포스팅을 보고, 다녀온지 오래된 그곳을 한 번 다시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방학동 간송 전형필(1906~1962) 옛집과 산소 앞길로 쭉 걸어올라간다. 왼쪽에 택시회사 건물을 두고 한 2분? 걸어가다 왼쪽 골짜기를 보면 작은 바위 사이로 제법 깊은 계곡을 만난다. 거기 바위에 '귀록계산歸鹿溪山'과 '와운폭臥雲瀑'이란 각자가 있다. 요 며칠 크게 낮아졌던 기온에 계곡은 꽝꽝 얼어붙었지만, 그 아래엔 귀록 선생이 들었을 물소리가 아직 나고 있었다. 바위에 새긴 글씨 수준도 상당한데, 18세기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듯싶다. 지금은 주춧돌은 고사하고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지만, 군데군데 다듬은 흔적 역력한 돌멩이들이 보인다. 한때 세도 당당했던 정승의 별서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어.. 2021. 1. 17.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ㅡ 찰스 대너 2021. 1. 16. 이전 1 ··· 72 73 74 75 76 77 78 ··· 8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