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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42

불효자는 웁니다 "옛날 아버지께서 남쪽에 계시고 제가 서울에서 공부할 적엔 300리 길이 비록 멀다 해도 가기만 하면 뵐 수 있었는데, 지금 계시는 북녘 산기슭은 도성都城과의 거리가 몇 걸음 되지 않아 잠깐 사이에 갈 수는 있어도 간들 누구를 뵈오리까. 제 일생이 끝나도록 다시 뵈올 길이 없습니다. 말은 입에서 나오려 하나 목이 메어 사뢰기 어렵고, 다만 이 엷은 술잔으로 저의 속정을 표하오니 아, 슬프기만 합니다." ㅡ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37, "아버지를 위한 제문, 누군가를 대신해서 짓다[祭父文 代人行]" *** 이상은 국립박물관 강민경 선생 글이다. 2020. 12. 13.
이규보 <눈에다 쓴 이름> 눈빛이 종이보다 하얗길래 雪色白於紙 채찍을 들고 이름자를 적나니 擧鞭書姓字 바람이여 제발 땅을 쓸지 말고 莫敎風掃地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다오 好待主人至 이규보 권8, 고율시 '눈 속에 친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2020. 12. 12.
그 아비에 그 아들..하필 술까지? 네가 어린 나이에 벌써 술을 마시니 / 汝今乳齒已傾觴 앞으로 창자가 녹을까 두렵구나 / 心恐年來必腐腸 네 아비의 늘 취하는 버릇 배우지 마라 / 莫學乃翁長醉倒 한 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 한단다 / 一生人道太顚狂 한 평생 몸 망친 것이 오로지 술인데 / 一生誤身全是酒 너조차 좋아할 건 또 무엇이랴 / 汝今好飮又何哉 삼백이라 명명한 걸 이제야 뉘우치노니 / 命名三百吾方悔 아무래도 날로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렵구나 / 恐爾日傾三百杯 권5에 있는 고율시古律詩인데 제목이 '아들 삼백(三百)이 술을 마시다'이다. 음, 드는 생각은 두 가지. 1) 부전자전父傳子傳이로다. 2) 아버지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을듯. *** 그림 글 모두 국립박물관 강민경 선생 글이다. 2020. 12. 7.
조선시대 대학출판부 요즘은 대학마다 출판을 맡은 부서가 있어서, 학교 교수의 저서나 학술적으로 의미있는 책들을 내곤 한다. 조선시대의 대학이랄 수 있는 성균관에서도 출판이 이루어졌는가? 물론이다. 이건 성균관에서 찍은 의 간기다. 병인년 4월에 거듭 찍어냈다는데, 아마 1806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성균관판 는 관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게 인쇄의 질이 나쁘다. 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왔는지 종이마다 들러붙어있어 떼는 데 애를 먹었는데, 그런 보존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애초 목판의 각도 썩 좋지 못하고 먹이나 종이도 고급이 아니다. 간기가 없었다면 방각본인 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책인데도 이 책의 주인은 꽤나 열심히 이것을 읽었다. 밑줄을 긋고 해석을 한글로 여백에 빼곡히 적었으며, 더러는 그것도 모자라 의문.. 2020. 12. 4.
제갈량 시를 적은 근대인 조병교趙秉敎(1862-1941) 촉한을 이끌었던 명재상 제갈량이 아직 남양 땅에서 밭갈던 시절, 초당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 이런 시를 지었다 한다. 초당에서 낮잠을 푹 잤더니 창 밖에 해가 뉘엿뉘엿하네 큰 꿈 누가 먼저 깨우리오 평생 나 스스로만 알리니 그가 낮잠자던 초당, 유비, 관우, 자~ㅇ비가 곧 찾아올 초당이다. 그 안에서 꾸었던 큰 꿈은 과연 천하를 3분하는 것뿐이었을까. 그로부터 천 몇백년 뒤, 한 한국인이 붓을 들어 제갈량의 시를 적었다. 퍽 활달한 필치로 거침없이 글자를 잇고 있다. 이 글씨를 적은 이는 금리 조병교趙秉敎(1862-1941)라는 사람이다. 군수, 관찰사 서리 등을 역임한 중견 관료였는데, 글씨에 재주가 있어 함경도 함흥역 현판을 썼다고 한다. 그의 손자가 한국 현대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친 조택원趙澤元(1.. 2020. 12. 4.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1521년 제주 리포트, 기묘명현의 붓끝에서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이란 분이 계셨다.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중종의 첫비 단경왕후端敬王后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해 사림의 신망을 얻었다. 이후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파직당하고 제주로 유배된다. 조광조와 친했고 끝내는 그로 인해 사약을 받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분이니 성리학 이념에 철저했을 것 같은 인물인데, 막상 그 문집을 보니 의외의 면들을 보게 된다. 제주목사 부탁을 받았다는 단서를 달면서 한라산, 용, 연못, 오름 신에게 제사지내는 글이 보인다. 심지어 제주의 몇 없는 고찰 수정사水精寺의 중창권선문重創勸善文을 짓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제주 고을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보고 듣고 기록을 남기니, 지금도 제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이 바로 그.. 202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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