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探古의 일필휘지515 고려사를 읽다가 - 화가의 대우 이광필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고려 무신정권기를 살았던 인물인데, 초상화와 산수화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의 아들이 9품 군직인 대정에 올랐다. 그런데 이에 딴지를 건 인물이 있었으니... 이광필의 아들이 서경(西京)을 정벌한 공으로 대정(隊正)에 임명되자, 정언(正言) 최기후(崔基厚)가 잘못을 지적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나이가 겨우 20세인데, 서경 정벌 때에는 10세에 불과하였다. 어찌 10세의 어린아이가 종군할 수 있었는가?” 라고 하며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서명하지 않으니, 왕이 최기후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이광필이 우리나라를 빛낸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광필이 아니었다면 삼한(三韓)에 그림의 명맥이 거의 단절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최기후가 서명하였다. 여기에.. 2021. 6. 4. 애꿎은 낙타 굶겨죽인 왕건 권13, 고려 태조 25년의 史贊. 忠宣王이 일찍이 臣 이제현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다리 아래에 매어 놓고 꼴이나 콩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을 '낙타다리'라 하였다. 낙타가 비록 中國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에서도 일찍이 낙타를 기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수 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피해가 백성을 해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를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기까지 하였을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創業하여 왕통을 전하여 주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 사람으로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함이었는.. 2021. 6. 4. 장이 약했던 고려말 임박林樸 선생 고려 말을 살았던 임박林樸이라는 사람이 1367년 제주안무사가 되어 바다를 건넜다. 그때 그가..... 도중에 나주(羅州)에 이르러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워 돌아갔으나, 비록 차 한 잔이라도 먹지 않았으니 민(民)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로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와싱가. 조정 관리들이[王官] 다 임선무(林宣撫) 같암시면 우덜이 무사 반란을 일으키잰 햄실건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 가운데 혹 물을 길어 온 것을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 권111, 열전 24 임박전 뭍에서 온 관리가 물마저도 길어온 것을 누구는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어진 마음씨로, 누구는 육지가 그리 좋더냐 하는 고까움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임박 본인이 물갈이가 꽤 심했던 게 아닌가 싶다. 2021. 6. 2. 소전 손재형의 글씨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1903-1981)이 1968년 어느 비 내리는 여름날, 忙中有閒망중유한을 썼다. 그는 이 구절을 퍽 좋아했는지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수작에 들지 않나 한다. 소전의 글씨는 때로 획을 무리하게 꺾고 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런 느낌이 덜하다. 획의 굵기나 글자의 배치가 균형이 잡혀있다고나 할까. 68년이면 그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인데, 그랬기에 "망중유한"이 더욱 와닿았을는지. 2021. 6. 1. 고려사를 읽다가 - 국제전쟁이 될 뻔 한 묘청의 난 인종 13년인 1135년 일어난 '묘청의 난'은, 일찍이 단재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크게 주목했고, 그 이후에도 이에 관해 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런데, 고려 역사 속 한 해프닝이건 또는 한국사 물줄기를 비튼 사건이건, 이것을 어쨌거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내란'으로 본다. 그런데 이 묘청의 난이 자칫 동아시아 국제전이 될 수도 있었다. 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己未 宋遣廸功郞吳敦禮來曰, “近聞西京作亂, 倘或難擒, 欲發十萬兵相助.” 기미 송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와 말하길, “최근 서경(西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평정하기 어렵다면 10만의 군사를 보내 원조하겠다.”라고 하였다. 묘청의 난이 한창이던 6월의 일.. 2021. 5. 30. 마지막 대제학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의 글씨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 그를 일컫는 수식어는 참 다양하기도 하다. 조선 최후의 문형文衡, 조선 말 문단의 거두이자 로 당시 문단의 이모저모를 증언한 문인, 12년간 진도에 유배되어 숱한 제자를 기르고 허백련과 허건을 알아보고서 호를 지어주었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인물이면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 편찬에 간여하고 중추원 촉탁, 경성제국대학 강사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적극 협조한 친일파라는 딱지가 붙은 문제적 인물이기도 한 정만조... 경성제국대학에서 그의 만년을 지켜본 조용만(1909-1995)의 회고에 따르면 "키는 작고, 머리를 박박 깎고 안경을 썼던" 정만조의 강의는 인기가 거의 없어서 자신과 김태준(1905-1949)이 거의 독선생으로 모시다시피 하여 한국 한시와.. 2021. 5. 26. 이전 1 ··· 69 70 71 72 73 74 75 ··· 8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