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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815

조선침략에 집안을 날려 먹은 히데요시 히데요시가 말년에 조선을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일본사 향배는 알 수 없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때 이에야스를 끼우지 않은 것은 히데요시의 이에야스 정벌 때 이에야스에게 치명적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일격이 참으로 매서운 것으로 히데요시는 어찌어찌하여 이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하기는 했는데 그 이후 죽을 때까지 이에야스 눈치를 봤다. 그 자신 관백으로 올라가 있을 때도 이에야스를 포섭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까지 인질을 보내고 친동생을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 부인으로 보낼 정도였고, 조선침략 때도 결국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믿지 못해 이에야스 없이 조선정벌을 감행했다. 히데요시로서는, 조선정벌을 성공했거나, 그게 아니면 조선을 쳐들어가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만 했더라도 아마 집안은 계속 .. 2024. 3. 3.
북방개척의 동반자: 무우? 윤관 북벌, 그리고 조선 전기의 북방개척 (사군육진) 때, 우리 농민들이 가지고 간 농산물이 무엇이 있을까. 문헌 근거는 많지 않아 보이지만 추정을 하자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조선 전기의 개척 때도, 쌀농사는 두만강 유역으로 들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밭농사가 주축이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기장과 조는 반드시 있었을 것 같지만, 보리를 들고 들어갔을까? 확실한 건 무우는 분명히 들고 들어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휴대품 중에 무우씨는 반드시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현지에서 군인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무우씨는 반드시 심었다니 사실 무우는 수확이 빠르고 끓여 먹고 구워 먹고 심지어는 날 것으로도 먹을 수 있어 무우는 반드시 심었을 것이다. 2024. 2. 27.
한국에서 목판인쇄가 번성한 이유 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제. 과거제가 시행되어 한적을 읽어내릴 수 있는 식자층 숫자가 확보됨가 동시에 이와 관련된 교보재 서적이 많이 필요해져 목판인쇄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대장경 조판. 대장경이 불교신앙심의 발로로 국가적 규모에서 조판되어 목판인쇄 수요를 계속 창출했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에는-. 첫째로 과거제가 없었다. 헤이시 이후 무가 정권은 과거제로 책읽을 필요도 없고 싸움으로 날밤을 샌 터라 자연히 식자층은 서울에 사는 공경과 산속의 스님들로 국한되기 시작하여, 책의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고, 이러한 상황은 불경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심의 발로로 사경을 많이 했지만, 장경 조판까지는 가지 않았고 국가적 규모의 조판사업이 진행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무가 .. 2024. 2. 27.
에도시대 이전 일본의 식자층과 인쇄문화 에도시대 이전 일본 문헌의 특징은 필자가 보기엔, 에도시대 이전에는 목판이건 활자이건 일본에서 찍어 낸 인쇄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없는건 아니고 있긴 있는데 현존하는 에도시대 이전 인쇄물의 태반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인쇄본을 들여오거나 (불경이나 인쇄서적 등) 일본 국내에도 사찰에서 목판 인쇄등을 했다고는 하는데, 불경을 제외하면 Printed in Japan은 그다지 그숫자가 많지 않은 것 같고, 인쇄본의 수요는 거의 해외에서 인쇄본 도입으로 충당한 것 아닌가 한다. 고려대장경 인쇄본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 고사기, 그리고 칙찬와카슈 등은 에도시대 이전 것으로 남아 잇는 것이 거의 필사본인 듯 하다. 한국의 경우 남아 있는 전적의 다수가 그것이 목.. 2024. 2. 27.
복원 전의 불국사 복원 전 불국사 사진을 보면 아무리 봐도 원래 신라 때 원래 모습은 일본의 뵤도인平等院[평등원]의 원형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 Editor's Note *** 불국사 담장 앞마당에는 본래 연지라 해서 연못이 있었다. 이는 창건 당시에 이미 그러했고 70년대 발굴조사에서도 흔적은 확인했다. 다만 전면조사를 하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물론 현재도 연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근대에 새로 만든 것이다. 2024. 2. 26.
간양록과 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를 쓴 신숙주 선생이야 당대의 수재로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힐 만한 선비이므로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간양록을 쓴 강항 선생도 당대의 문과 급제자로 당시 조선의 일류 문사라 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이 쓴 일본에 대한 글, 해동제국기와 간양록은 작자의 지적 수준에 걸맞게 적혀 있는 내용이 단순한 당대의 전문을 모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 봐도 굉장히 정확한 내용이 적혀 있다. 시바료타로는 신숙주 선생의 해동제국기가 매우 소략하다고 비판했다던데 당대 일본이 조선을 그럼 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실로 이 책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 중 최고수준이던 두 양반의 지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숙주 선생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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