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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25

도주보다 더 무서운 사보타지 노비사역이 주가 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서노비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 오희문 선생의 쇄미록을 보면 슬하의 노비 관리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바, 사실 이 양반의 고민은 시도때도 없이 도망가는 노비를 잡아오는데 있지 않았다. 그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노비의 사보타지였다. 그의 일기를 보면 밭 매기 추수하기 타작하기 등에 노비에 품팔이 인력까지 사서 내보냈는데도 이들이 제대로 일을 안해 제때 마치지 못해 씨를 파종을 다 못끝내거나 수확한 곡식을 제때 못거둬들여 쥐가 다 먹거나 썩어버린 기록이 부지기수다. 이는 노비 사역이 지주-전호제로 이행하는데 있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우리나라 외거노비들은 주인의 사역에 동원되지만한편으로는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 2025. 8. 21.
겨자가 없으면 생선회를 못 드셨던 오선생 오희문 선생은 생선회를 꽤 즐겨서 생선을 먹을 때 싱싱해 보이면 항상 회부터 치게 했다. 이 때문에 백프로 이 양반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을 터. 민물생선회를 먹을 때 항상 찾는 것은 겨자이다. 겨자가 없으면 생선회를 먹지 않을 정도로 둘 사이의 궁합을 중요시하였으니, 겨자가 지금의 와사비와 맛이 비슷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조상들은 조선시대때 우리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생선회를 드셨던 셈이다. 사실 생선회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꽤 많이 남아 있어서, 요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즐기는 송어회를 먹는 방식처럼생선회를 얇게 채 썰어 거기에 야채를 함께 버무려 먹곤 했으니, 우리나라가 생선회를 먹는 방식은 오희문 선생이 먹는 것처럼 겨자를 곁들여 먹는 방식까지 합하여지금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 2025. 8. 21.
조선후기사에서 폐기해야 할 두 가지 개념 필자가 생각컨데 조선후기사에서 폐기되어야 비로소 역사인식에 물꼬가 트일 두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실학, 특히 중농주의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보는 개념이다. 둘째는 동학혁명을 "동학농민전쟁"으로 보는 개념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근대의 선구로 보고, 동학혁명을 "농민전쟁"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덧칠해 놓은 것은 농민들을 혁명의 주체로 보고 토지균분과 공동생산을 근대적 발전 방향으로 모색한동아시아적 혁명론 (마오이즘 등)의 투영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19세기는 이런 시각으로 봐서는 그 전모를 쉽게 드러낼 수 없다. 조선후기를 변혁시킬 주체는 이러한 중농주의 실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다. 조선후기 향촌에서 성장해 나오는 가짜 양반들,유학모칭자들. 이들이 바로 서양사, 일본사에서 부르.. 2025. 8. 20.
19세기, 미천한 가문의 등제자들 앞서 19세기가 되면자기 집안에 등제자가 한 명도 없거나 미천한 가문 출신이라는 대과 합격자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 바, 이 사람들이 과연 전부 "잔약해진 양반 집안 출신"들일까? 이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필자가 보기엔 19세기 유학모칭자들이 섞여 있다. 19세기 유학모칭자들은 단순히 군역이나 빠지려고 유학을 모칭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과거에도 응시하여 명실상부한 사족으로 발돋움 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그 결과가 족보나 호적으로 봐도 집안에 등제자 한 명도 보이지 않는혈혈단신 대과 급제자가 많이 나왔을 것이라는 말이다. 대과 급제자가 이럴진데이보다 더 많이 뽑는 사마시 (소과) 급제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도 아마 유학모칭자들이 바글바글했을 것이다. 학.. 2025. 8. 20.
못배운 한 조선시대 호적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호적 등본 같은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시대 호적은호적에 병적기록부 (특기까지 기재), 그리고 심지어는 재산에 사회적 지위까지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당시 호적에는 이름과 자신의 직역, 3대조 벼슬까지 모두 적고 주호(호주)의 이름 아래에는 거느린 노비들 이름까지 죄다 적어 놨기 때문에 농사일이 노비사역으로 주로 이루어지던 시대에는 이는 그 집의 재산상태, 토지 소유 상태까지 엿볼 수 있다고 해도 되겠다. 20세기 한국인 특유의 이른바 "못배운 한"은 조선시대 후기의 이러한 호적기록 방식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적에서 양반과 평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구분선은, 결국 내 이름에 "유학"을 달 수 있는가 없는가다. 유학이란 과거를 볼 수 있는 관료예비군 .. 2025. 8. 20.
3대가 벼슬을 못하면 양반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있는데이는 잘못된 말이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남아 있는 사마방목, 호적, 족보 등을 면밀히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일단 보자. 남아 있는 호적을 보면, 주호(호주)의 이름, 본관이 기재되고, 그 사람의 아버지, 조부, 증조부, 외조부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배우자의 부, 조부, 증조부가 호적에 같이 적혀 있다. 따라서 총 7명의 조상의 이름이 적히는 셈이다. 이 7명 조상 이름에는 직역이 적히는데, 여기에는 벼슬이 적히면 좋지만 벼슬이 없을 경우, 대개 양반이 죽고 나면 "학생"으로 적힌다. "살아서 유학, 죽어서 학생"이 양반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따라서 호적에 어떤 사람이 적혀 있고 본인은 "유학"그리고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가 "학생"이라고 적혀 있.. 2025.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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