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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587

찹쌀떡 팔다 중추원 의장도 되고, 고무신 장사도? 구한말 외부대신, 법부대신, 그리고 중추원 의장을 하다가 일제시대에는 작위를 받아 귀족 대접을 받던 이하영-. 그는 사실 이항복 후손으로"집안은 거족이나 직계에 벼슬이 없어 어릴때는 찹쌀떡도 팔고 동자승을 하려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구한말 출세하여 대신과 중추원 의장 등 크게 영달하였다. 고종 시기에 출세한 이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원래 양반이었다가 벼슬이 끊어져 고생하다 출세했다는 것인데, 이하영은 찹쌀떡을 팔았다지만, 같은 구한말 군부대신을 지낸 이용익은 원래 양반 집안이지만 보부상을 했다 한다. 이들만이 아니라 구한말에 활약한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집안 내력의 클리셰가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양반인데 벼슬이 끊어져 어릴 때 막일을 하며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몰락양반의 후손인.. 2025. 9. 16.
18세기 호적과 노비 18세기 호적의 노비가 사실은 머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이 시대 호적을 직접 못 본 사람들이다.이 시기 호적은 주호 밑에 노비 이름을 줄줄이 적어두게 되어 있고, 이 노비들은 성도 없고 이름만 달랑 적혀 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호적에 안 적는다. 그렇게 주호 밑에 종속된 사람들이라는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만약 머슴처럼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라면, 주호 밑에 종속되어 적힐 리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 이름 죄다 빼고 적을 리도 없다. 거듭 말하지만, 18세기 노비는 머슴이나 이런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라, 인신이 예속된 사람들이다. 서양사에서 본다면 농노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상태에서 18세기 후반 거쳐 19세기로 들어가면서노비들이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 가구를 형성하고스스로가 주호가.. 2025. 9. 16.
18세기 노비를 직시해야 한다 요즘 인터넷 보면 18세기 노비는 사기라던가 그게 아니라 그때 노비는 머슴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보는데18세기에는 전국민 절반 이상이 노비가 맞다. 조선시대 호적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기 때문에역사를 그렇게 왜곡해서는 안 된다. 흔히 한국인들 스스로가 하는 말 있지 않는가,역사를 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던가. 이 경우가 딱 그렇다. 18세기 노비를 이해해야19세기 유학 모칭자들이 여는 새로운 시대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19세기의 그 자칭 "잔반"들은 잔반이 아니다. 몰락양반?19세기에는 몰락양반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평민에서 노비에서 유학으로 올라와 았었다. 19세기의 많은 유학, 그 사람들은 원래 양반 후손이 아니라 대부분 평민, 아니 더 많은 수가 노비의 후손이었다. 19세기에.. 2025. 9. 16.
금계랍-키니네 광고 20년대 신문 광고를 보면국내산 광고가 거의 없다. 대부분 해외 수입품으로 미국 쪽에서 실어온 박래품이거나 일본산 공산품이 많은 것을 보면당시 조선의 척박한 산업기반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점까지도 조선에서 내다 팔 것은 쌀밖에 없었던 셈이다. 위 광고는 약수입상의 광고인데, 금계랍과 각종 피부병 치료제를 팔고 있다. 금계랍은 키니네, 말라리아 약이다. 오늘날에는 열대지역 말라리아 감염이 우려되는 지역으로 여행하는 분들에게 사전 복용시킨다. 이 광고를 보면 키니네, 금계랍은 만병통치약이다. 학질 말고도 열병에는 다 복용하며 매일 조금씩 복용하면 보약으로도 쓸 수 있단다. 그러니 좀 비싼 듯 해도 집집마다 한 병씩 사두란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학질이 정말 많은 나라라 열이 날만 하면 금계랍을 먹으.. 2025. 9. 15.
20년대, 여러 명이 말하던 민족개조론 춘원은 30년대 말의 행보로이전까지 소급해서 욕을 먹고 있는 측면이 강한 듯 한데,사실 춘원이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당시 (1922년)이 주장을 한 사람은 춘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음은 당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예 특집기사를 만들어 여러 명이 연재하거나 아니면 외국인에게 한국인의 결점, 고칠점을 이야기해 달라 하여그것을 정초의 신년 기사로 싣거나 하기도 했다. 이런 경향이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꽤 보인다. 아마 춘원처럼 30년대에 변절의 혐의가 생겼다면이 사람들도 덩달아 모두 소급하여 욕을 먹었을 것이로되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양반들은 대개 춘원처럼 인생 마무리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신문 사회면은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운동하는 이들이.. 2025. 9. 15.
문인으로 생활하는 춘원 1925년의 신문을 보면 춘원은 명백히 문인으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날짜 신문 하나만 보아도 영대靈臺라는 동인지에 그의 글이 실려 있고, 동아일보에 소설도 하나 연재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재생"작자가 "장백산인"으로 되어 있지만 이건 춘원이다. 장백산인이란 백두산인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 삽화를 그린 안석주는 KAPF 소속 예술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사가다. 당초 이 양반이 작사를 할 때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노래를 작곡. 이 시기는 춘원이 이미 "민족개조론" (1922년)을 발표한 뒤라 이전과는 정치적 행보를 달리 할 때였다. 2025.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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