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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588

1938년까지도 신분이 불안정했던 고보 재학생 1923년에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된 후 신교육령에 따라 조선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은상급학교 진학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혼란이 야기되었다. 사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란일본의 고등소학교에 해당하는 학교 였는데이는 대학진학을 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제도를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위 표를 보면 고등소학교가 바로 우리의 고등보통학교에 해당하는 것인데, 수업 연한으로 보면 우리는 5년으로 되어 있어 일본의 고등여학교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등소학교가 됐건, 아니면 고등여학교가 되었건 일본의 경우 이쪽 길을 타게 되면 대학으로는 가지 못한다. 대학을 가려면 무조건 중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이 시기 조선인들은 중학교 진학자가 거의 없었고 대개 일본인들이 중학교, 조선인들은 고등보통학.. 2025. 9. 13.
1920년대의 치약 조선의 신문 광고에서 자주 등장하는 치약 광고는 "쿠라부 치마"다. 치마란 치약을 당시 일본에서 부르던 이름인데,일본에서 치약은 메이지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이 시기가 되면 치약가루(치마분), 액상치약, 크림형 치약 (연치마) 등으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대체로 지금의 치약과 비슷한 것은 크림형 치약인 연치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국내에 통용되던 치약은 모두 수입품으로 국산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쿠라부 치약은 당시 꽤 유명했는지인터넷에는 1920년대의 이 치약에 대한 리뷰가 꽤 보인다. *** [편집자주] *** 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칫솔과 치약, 나아가 치과학 도입에 앞선 시기 저 양치질 문제와 치과 치료 문제는 생존과 직결하는 문제 아니었겠는가?오죽 저 치통이 문제였으면.. 2025. 9. 13.
1920년대의 영화관 1920년대에는 영화관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위 광고는 1923년 10월자 신문에 실린 조선극장과 단성사의 광고로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광고다. 활동사진 내역을 보면, 이때는 아직 조선인의 손으로 영화가 제작되기 전이라 (나운규의 아리랑은 1926년)대부분이 미국 영화였다. 예를 들어 위에 단성사에서 상영한다는 "독선풍"은 무슨 무협지 같지만 사실 서부극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관이라 해도 쑈를 겸한 극장이 있어 위 광고 오른편 조선극장에는활동사진 상영과 함께 권번 기생들이 나와 노래도 부른 모양이다. 연예인의 쑈와 영화를 함께 상영했으니 꽤 재미있었을 것 같다. 참고로 이 당시 영화표 값은 얼마나 했을까? 조선의 당시 표값은 알 수가 없지만 미국은 1922-1923년 당시 영화표 값이 7센트 정.. 2025. 9. 13.
1920년대의 이병도 이병도 선생은 일전에 한 번 살펴 본 바 있으나 그 내용을 전제하고 좀 더 보강하여 자세히 적어본다. 선생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쳤으며, 이어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 고등예과(高等豫科)를 거쳐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했다.요약하면: 한성보광보통학교-중동학교-보전 법률학과 (1915)-와세다대 고등예과-동 문학부 사학 및 사회학과 졸 (1919)이다. 중동학교는 고보 (중학) 졸업이니 보전 입학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어 와세다대 고등예과를 들어갔다고 한다. 선생은 보전 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같은 학력을 얻었기 때문에, 예과를 들어갈 .. 2025. 9. 13.
일제시대 나오는 조선인 업적은 모두 총독부 공인가 일제시대에 대한 우리의 역사학적 클리셰가 수탈이다 보니 일제시대 조선인이 만들어낸 업적에 대해서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에 조선인들은 모두 수탈에 신음하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런데 그럴 필요 없다. 일제시대에는 당연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그것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주 조직적으로 있었다. 단순히 감정상의 차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인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차별에 대한 저항을 생각하자면 대개는 독립운동이나 동맹휴학등만을 생각하는데, 차별을 뚫고 놀라운 업적을 만든 사람도 많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례로 손기정만 생각하는데 각 분야에서 다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일제시대에도 세계에 대한 소식은 충분치 않지만 조선인들에게 계.. 2025. 9. 13.
두계 이병도의 등장: 1923년 1923년에는 동아일보에 두계 이병도 선생의 "조선사개강"이 연재된다. 이것이 아마도 두계가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사론을 발표한 첫 번째가 아닌가 하는데 (아닐 수도 있다)1923년 동아일보에서는 무려 1면 다단기사로 두계의 사론을 싣기 시작,총 60여 회를 연재했다. 두계가 1896년 생이니 이때 나이 서른도 안 되었던 셈이다. 1920년대 문단과 학계의 전면에서 활약한 이들은 대부분 그 정도 나이였다고 본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이광수도 1892년 생으로 두계보다 4살이 많다. 따지고 보면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사람들인데, 그 앞에 이런 분야에서 신풍조를 받아 일할 이가 워낙 없다 보니 대략 1890년 생들이 1920년대에는 벌써 전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25.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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