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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382

하늘이 조선을 불쌍히 여겨 내렸던 은혜 두가지 임진왜란때 하늘이 딱 보니 저건 놔뒀다간 나라 문닫겠다 싶어서 하늘이 불쌍히 여겨 내린 은혜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요. 다른 하나는 승병이다. 조선시대에 기적처럼 승과가 부활하여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 승과 급제자들이 임란때 승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웠다. 만약 승과 부활이 없었다거나, 백년만 임란 발발이 늦었으면 내가 보기엔 승병들은 왜병이 아니라 조선관군이나 의병과 싸웠을 가능성 배제할 수 없다. 그래도 수천년을 이어온 나라인데 하늘이 불쌍히 여겨서 기적처럼 승려들에게 급제자 홍패를 하나씩 안겨주니 이 양반들이 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녹을 먹던 유림도 다 도망가는 판에 분연히 들고 일어나 전국의 승려들을 불러모아 조선편을 들었다. 아마 이 양반들이 후세를 볼 재주가 없어 그런것도 .. 2023. 5. 18.
탈레반식 폭거로 사라진 불교유물들 한국은 명색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이고 서기 7세기에 이미 인도로 적지 않은 숫자의 승려가 구법여행을 떠났으며 같은 시기 원효의 저술이 동아시아를 뒤흔들고 서기 11세기부터 대장경-교장 조판을 여러 번 반복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남은 게 없냐라는 생각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조선시대 5백년 내내 불교 승려는 중놈이라는 비칭을 입에 달고 살았고, 시도때도 없는 부역에 끌려 산성이라는 산성은 모두 승려가 쌓은 것 같고, 틈만 나면 동네 유림들이 몰려와 구타하고, 부처의 목을 베고, 심지어는 불까지 질러도 나라에서는 말 한마디 안했는데, 어떻게 뭐가 남기를 바라겠나. 탈레반식 폭거를 5백년을 계속했는데 뭐가 남아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임. 초조대장경도 국내에 몇 부 없는데 일.. 2023. 5. 18.
국박: 스토리의 독립 그리고 완결 필자는 국박 운영이나 전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란 것은 잘 안다. 가끔 자주 국박 가는 사람으로서 일본의 국박도 자주 돌아 본 사람으로서 드리는 고언이라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적어도 한국의 국박이라면 그 안에 전시된 것들은 자기 완결, 독립의 스토리를 가지고 그것이 한국사와 정확히 맞물려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국박에 전시되는 것들이 한국사에 끼워 넣는 스토리에는 부족하지만 일본사에서는 스토리가 성립되는 이런 물건들은 한국사와의 정확한 관계 고리가 완성될 때까지는 전시에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뜻이다. 이전 글에서 썼지만 국박에 들어오는 유물들이 얼마짜리라는데, 대중이 좋아한다는데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되는 것은 국박이니까 그렇지 않겠는가. 한국 국박을 보고나서 유물들이 대단하기는 한데.. 2023. 5. 17.
도통 스토리를 모르겠는 한국 도자기 한국 도자기의 질적 수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쓰고 글을 풀어가겠다. 우리 도자기의 경우는 이것을 "완상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스토리가 없다. 미안하지만 나 같이 무식한 사람은 이 도자기가 경매 때 비싼 값이 형성이 되므로 국박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기 때문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솔직히 잘 이해하기 어렵다. 무식한 탓이겠지만, 한국 도자기는 스토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도자기를 완상하는 전통이 정말 한국의 전통이 맞는지도 의심한다. 일본은 확실하다. 히가시야마 이후 다도가 일어나면서 도자기의 완상 전통도 함께 일어났다고 하니까. 그래서 조선도자기를 미친 듯이 사 모았다고 하니까. 걔들은 도자기를 감상하게 된 역사적 이유가 있다. 우리 도자기는 미적으로야 뛰어.. 2023. 5. 16.
조선의 美 간단히 쓰자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조선의 미는 일본미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목하 한국에서 박물관을 가면 차지하는 자기에 대한 찬상은 사실 일본미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의 자기에 대한 미의 발견은 그릇 하나를 놓고 성을 주고 받을 정도라던 일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단절성이 일본에는 없다. 물론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근대적 모습으로 포장하기 위한 인스피레이션을 서양의 학자들에게서 받은 것은 틀림없는데, 이 친구들은 자기들의 전통에서 자기 미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성공한 미를 조선에 연장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약 좋은 칼이 많이 났다면 해방 후 한국은 일본도처럼 칼에서도 미를 찾았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판화가 많이 찍혀 나왔다면 우키요에처럼 그 안에서 미를 찾자고.. 2023. 5. 16.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카박물관에 받은 충격 내가 처음 미국 스미소니안에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거기 모아 놓은 아프리카 미술을 보고 지적 충격을 받았다. 비합리성, 비의도성, 원초적 미. 아프리카 미술은 위대하다 생각했다. 요즘 생각해 보면 내가 당시 아프리카 미술을 보고 받은 느낌이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1889~1961]가 조선 미술을 보고 쓴 시각과 아주 비슷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야나기의 조선미술에 대한 발견에 한국인이 앞으로도 계속 만족하고 맞장구를 칠것인가는 한국인들 스스로가 선택할 몫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에 잠재해 있다는 그 전설적인 "자연친화적 미"라는 것에 우리도 이제 조금 솔직해 질 때가 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에 대한 평가는 양날의 칼이다. 약이자 독이다.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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