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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28

학계 업무의 나이에 따른 분담 앞에 쓴 이야기를 조금만 더 써 보면 학계에는 creation이 담보되어야 나설 수 있는 자리가 있고경험이 없으면 감당 못하는 자리가 있다. 필자는 앞의 일과 같은 자리에 나이 든 사람이 자꾸 나타나는 것도 문제지만, 뒤의 일과 같은 업무에 젊은이가 자꾸 나타나는 것도 문제라 생각한다. 학계에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연구자들은 있어야 될 자리가 있다. 나이가 든 연구자들의 경우 그 풍부한 경험이 아깝지 않은가? 마땅히 학술지를 더욱 훌륭한 수준으로 키워 내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영감님들 자리다. 젊은 학자가 학술지 편집인을 맡는다? 그 사람 연구는 그걸로 끝장이거나 아니면 그 학술지는 산으로 간다. 학술지 편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 왠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학술지가 제대로 나오기 힘들기 때.. 2025. 7. 13.
나이 든 연구자들의 가장 적당한 기여 나이 든 연구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필자가 보기엔 책이나 학술지 편집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랜 식견이 축적되어 농익은 오래된 연구자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이 오픈되어야 하며특히 학술지 심사-. 필자는 젊은 연구자들보다는 나이든 연구자들이 수행해주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젊은 연구자들은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야지 학술지를 젊어서부터 편집에 시간을 쏟는 것은 그 당사자에겐 대단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젊은이들에게는 적당한 작업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술지 논문 심사는 해 줄 사람이 없어 몇몇 헌신적 연구자rk 자기 시간을 때려 부으며 심사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러한 학술지 논문심사를 많이 하지 않는 이유? 당연하다. 익명 심사라 자기 시간만 쓰게 되고자기 이름 하나 기억되.. 2025. 7. 13.
학회가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이유 나이가 들어도 학술활동, 연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유심히 보면 나이가 든 사람의 경우 실제로는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이리저리 조합하여 새로운 결과물로 내 놓을 뿐이지실제로 이전에 전혀 없던 논리나 주장의 생산은 하지 못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일견 현명하게 보이는 것은 젊은 시절보다 축적된 경험이 많아져어떤 이야기의 단초만 들으면 진행과 결과까지 거의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은시절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경험을 잘 활용하면나이 들어서도 상당기간 이 방식으로 학술활동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학술활동을 하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노령화한 연구자들이 너무 전면에 나서 연단 발표까지 하게 되면그 학회.. 2025. 7. 13.
가짜양반을 역사의 주인공의 자리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19세기에 대량 출현한 가짜양반들-. 이에 대해선 애매한 평가와 기술이 대부분인 것 같다. 대략 삼정의 문란으로 혼란해진 질서을 뒤집고 나와양반을 모칭한 사람들이라던가, 그게 아니면 조선후기 양반수 급증 원인 정도로 간단히 처리될 뿐 이들이 사실은 동학혁명, 갑오경장, 구한 말 이후 개화운동,일제시대 조선사회,해방 이후 근대화, 이 모든 흐름 뒤에는 바로 가짜양반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9-20세기 한국사회를 근대화의 물결로 밀고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이들 "가짜양반"들이다. 우리는 가짜양반을 근대사 역사 발전의 주체로 다시 봐야 한다. 가짜양반들의 신출귀몰한 전변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근현대 한국사는 없다. 2025. 7. 12.
용도불명의 목활자본: 열성수교 (6) 조선후기는 지금까지 쓴 대로 군역을 빠지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무지막지하게 분출된 시대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최근의 병역기피하고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현대의 병역기피와 군역기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측면이 있다고 본다. 사실 조선시대 신분은 호적에 기록된 직역이 가장 정확하다고 보는데이 직역에 기록된 방식은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직역이란 결국 국가의 관리로 등용되면 그 관직명이 직역이 되고, 관직을 갖지 못한 양반은 "유학"이 되며,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결국 평민들의 직역을 받게 되는 셈인데 그 평민들 직역 안에 군역이 있는 것이다 (노비는 직역이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군역기피"는 그 의미의 방점이 "병역기피"에 찍히는 것보다"신분상.. 2025. 7. 11.
처가로 가서 살던 시대 그리고 씨족의 전국적 확산 이건 필자의 추정에 불과하지만, 남편이 처가로 가서 살던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 어느 쪽이 더 그 씨족의 전국적 확산이 빠를까? 필자가 보기엔 남편이 처가로 가서 정착하는 시대가그렇지 않은 시대보다 전국적 확산이 빨라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중기까지도남편이 처가로 가 살다가 돌아오거나 혹은 아예 현지에 정착해 살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조선 후기 유교적 종법이 정착되고 친영례가 권장되면서이러한 관행은 사라진 것으로 안다. 우리의 성이라는 것은 부계를 반영하므로 남편이 처가 쪽으로 가 살다가 그곳에 정착해 버리면 다른 지역으로 그 성의 확산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남편이 움직이지 않고 전적으로 아내가 남편 쪽으로 "시집만 가는" 형태의 혼인만 남으면여자 쪽이 동일 거.. 2025.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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