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696 청금록은 언제 사라졌는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는 단순히 서원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라, 동학혁명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를 구분짓는 중요한 사건의 하나다. 서원이란 그 설립 기원은 차치하고 조선후기 급속도로 확대해간 배경에는 역시 그 뒤에는 향교가 있다. 서원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이전에는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향교가 중요한 향촌의 교육기관이었는데여기에는 양반집 자제와 평민들이 함께 혼재하며 기거한 바 이들은 향교안에서도 같이 있지 않고 동재 서재로 나누어 기거하였다. 요즘 시골 항교를 가면 동재 서재가 있는데여기서 한 쪽은 양반들 자제가 기거하고 다른 쪽은 평민 항교생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군역을 피해 들어온 놈들이라고 하고 양반들 자제가 튀어 나가 자기들끼리 따로 공부하기 시작한데가 바로 서원이다. 서원의 설립과 .. 2025. 12. 10. 유교에서 족보도 없는 이야기 청금록 (5) 규탄하고 걷어내야 하는 장막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뭐냐. 우리나라는 조선후기의 청금록, 소위 향안을 모호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서원, 향약 등과 묶어서 조선 유학의 심화과정으로 보고 있는 듯 한데서원이나 향약은 유교에 근거라도 있지 청금록은 족보도 없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법 장부다. 가장 비슷한 것을 들자면 당나라 이전 육조시대 귀족들이자기들끼리 장부 만들고 서로 추켜주며 귀족 행세하다가 당 태종한테 걸려 작살났던 그런 귀족행세 정도가 비슷할 텐데이런 식의 양반 씨를 기반한 폐쇄적 공동체는 송대 이후 사대부사회에서 엄중하게 비판받던 것으로,청금록 자체는 임란 이후 부상해 올라오는 신흥 "유학"들, 소위 청금록 등재자들이 이야기 하는 바, "놀고 먹는자"들에 위협을 느낀 이들이 따로 자기들끼리"진짜 양반 명부"를 만들.. 2025. 12. 10. 유교에서 족보도 없는 이야기 청금록 (4) 귀족이 없는 나라에 느닷없이 생긴 조선귀족 조선에는 귀족이 없다. 조선은 유교 국가. 그것도 송대 이후 발달한 사대부 사회에 기반한 사회이므로 국가는 양천제가 기본이며양반이라는 세습 귀족 비스무리한 것이 나왔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들은 귀족이 아니다. 귀족처럼 되고 싶었겠지만 원칙상으로 귀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조선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사대부 안에 별도의 양반의 씨를 규정한 청금록 따위는 당연히 불법 장부이자 반 유교적 문서에 해당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와 비슷한 황당한 사건이 바로 경술국치 당시 조선인에게 주어진 "조선 귀족"이다. 이 조선 귀족 사건은 이 자체 친일이라는 문제 외에도 조선에서 "귀족"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으로, 귀족을 준다면 도대체 누구를 세습 귀족으로 임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겠다. 이와 가.. 2025. 12. 10. 유교에서 족보도 없는 이야기 청금록 (3) 불법 권력장부 쉽게 말해서 호적이라는 것이 국가가 만든 주민등록부라면 청금록이란 나 정도 되야 양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따로 만든 Who is who, 명사록 정도 된다는 말이다. 당연히 호적에는 번듯이 유학, 업무, 업유라 적힌 이들도 청금록에는 못 실리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청금록 정도 실려야 양반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이런 시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오만과 편견"에서 보이는 주인공 베냇 집안은 젠트리인가 아닌가. 당연히 전통의 명가 다아시 집안에서 보자면 근본도 없는 집안이지만 100년만 지나보면 다아시나 베넷이나 결국 젠트리에서 뒤섞이지 않았겠는가. 각설하고, 이 청금록이라는 것은 단순한 신사명부가 아니라, 일종의.. 2025. 12. 9. 유교에서 족보도 없는 이야기 청금록 (2) 유학모칭자들이 두려운 기성 양반들 물론 청금록靑衿錄이라 하면 향적, 유적, 향안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에 나오는데 그 기원을 따지자면 최소한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올라가며원래는 향촌 사회의 유생의 장부로 단순한 성격의 기록물이었던 것이 조선후기가 되면서 각종 권위와 이권이 섞이면서 성격에 큰 변화플 겪은 것으로 안다. 이 청금록은 호적에 유학이라 기재되어 있더라도정작 청금록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집안이 많다. 그 동네에서 전통적인 양반의 씨, 유학을 호적에 붙이는 정도로는 들어갈 수 없고, 그래도 우리 정도는 되야 양반이라는 사람들끼리 모여 향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향촌사회에서 이전에도 썼지만 소위 "놀고먹는자들"이 줄줄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임란 이전까지만 해도 극히 소수이던 양반들이 17세기 이후부.. 2025. 12. 9. 유교에서 족보도 없는 이야기 청금록 (1) 구별을 위한 표식 우리나라 족보보다는 사료적 가치는 당연히 호적이 한참 위다. 족보는 믿을 수가 없다. 완전히 구라인 것도 있겠지만일정 정도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에도 교묘하게 자기 위주의 서술을 해 놓아서 이 사람들이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족보로는 전혀 알 수 없다. 당연히 제3자인 당시의 관청에 의해 유지된 공식 기록인 3년마다 작성한 식년 호적의 기록이 1급 사료다. 호적이 남아 있다면 족보는 발 붙일 자리가 없다는 것은 그 뜻이다. 호적이 없으면 족보의 문제점을 살필 방법은 20세기 이전 출판된 족보 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이것도 16, 17 세기 족보면 모를까19세기 말이 되면 이미 현대 대동보 골격이 다 갖추어져서 족보끼리의 대조만으로는 위조 여부를 판별하기 극히 어렵다. 이야기가 처음부터 옆으로 샜는데.. 2025. 12. 9. 이전 1 ··· 4 5 6 7 8 9 10 ··· 450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