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24 구한말의 조선과 검안檢案 서류 필자가 조선시대 호적과 족보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필자가 앞으로 수행할 연구의 밑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현재 조선시대 검안서류의 의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바, 검안서류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연구가 많이 수행되어 있기 때문에필자가 더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서류의 시장, 즉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분석이 미비한 바 이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 검안서류의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에 대한 검토가 중요하다. 사망자가 왜 죽었는지 다양한 증언과 취조가 나오는 과정에서 구한말의 조선사회가 역력히 드러나는 바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학의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17 -19세기까지의 사회적 변동을 일차적으로호적과 족보를 통해 대략 살.. 2025. 8. 28. 한일 학계가 주목해야 할 야요이 농경의 기원 "신석기 농경혁명은 농경민 외부 유입에서 비롯" "신석기 농경혁명은 농경민 외부 유입에서 비롯""끼리끼리 놀아, 수렵채집인에 준 영향 미비" 고대 DNA 분석 결과, 이주를 통해 농경이 확산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드러났다BY Adrienne Berard, 펜실베이니historylibrary.net 목하 김단장께서 포스팅 한 위 연구는야요이시대의 개시와도 관련하여 음미할 부분이 많다. 최근 동아시아도 DNA연구의 결과 야요이인의 기원과 관련하여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고위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는 바, 우리 학계도 이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라 하겠다. 2025. 8. 28. 양반 수포收布, 그 실패가 부른 파장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양반이 군역을 지는 개혁이 완수되었으면아마 19세기에 모든 사람이 유학으로 끝나는 모습은 보지 않읗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균역법 군포 대상자가 양반 직역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양반의 말단- 중인-부농까지 군포를 부과하고 선무군관을 부여하는 정도에 그쳐 결국 군역의 완전한 회피를 위해 양반의 상징인 유학의 모칭이 계속 되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유학을 칭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반의 특권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한 것이 양반에 대한 모칭을 계속 불러왔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후기에 가장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서얼-중인-부농으로 구성된 집단인데이들은 양반의 말단 내지는 중인, 부농으로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 2025. 8. 28. 조선시대 호적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보유) 첫째. 우리나라 조선시대 호적에는 1770년대까지도 노비 사역이 완전히 청산 안 되었다. 아래에 노비 10여명씩 두고 사역하는 양반들이 이때까지도 드물지 않다. 물론 이전 시기보다는 노비 사역 규모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둘째. 우리나라 호적은 1800년대 중반 들어가면 노비사역이 거의 사라진다. 이때가 되면 3-5명 단위의 소농으로 나라 전체가 재편되는 듯 하다. 이 부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세째. 그런데 문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이 시기 호적이 개판이다. 필자는 족보를 가지고 대조해봤는데대체로 1/5도 호적에 안 올라온 것 같다. 이처럼 엉망인 호적이 19세기 중반되면 좀 나아지는데 이 시점이 되면 거의 모든 가구가 유학이 된다.. 따라서 노비사역이 중심이 된 시대와 소농으로 완.. 2025. 8. 28. 역사속에 묻혀 버린 서얼 한국 근대사는 필자가 보기엔서얼에 대한 제대로 된 솔직한 연구 없이는 이해가 불가하다. 서얼이란 서자와 얼자를 합쳐 이르는 이름인데 서자는 어머니가 평민, 얼자는 천민인 경우로 서자보다 얼자가 더 심각해 이 경우는 홍길동처럼 호형호제가 되지 않았다. 서자는 그것은 아니며 차별은 있었지만 어쨌건 반쪽 양반이라도 호적에서 계속 잡히는 것을 볼 수 있고2, 3대 내려가면 금고도 풀리는 경우를 본다. 다만 적자 종손으로 내려가는 집안에 비해 족보에서 특별한 설명 없이 쇠락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후손들은대개가 서자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 흔히 이야기하는 구한말 성을 쓰게 되면서 주인 집 성을 죄다 받아 썼다는 노비들은전부 얼자라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문제는 이 숫자가 우리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는 것이겠다. 실제.. 2025. 8. 27. 대과 응시자도 제대로 안 읽었다는 중용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어느 정도로 한문을 능통하게 사용했을까. 그 중에는 물론 대 문호 급 문인도 있겠지만, 유생이란 말이 아까울 정도의 수준 미달도 많았던 듯 한다. 조선 중엽의 향교 교생들을 보면, 기록에 이들 중에는 기초적인 한문 독해도 안 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 기록도 있다. 너무 수준 미달이 모이다 보니 이를 피해 모인 곳이 서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리학의 사서, 라면 주자가 집주하여 현창한 덕에 이는 줄줄 외우고 다녔을 것 같지만 의외로 중용을 제대로 안 봤다는 기록이 드물지 않으니, 첫 번째는 영조의 젊은 시절 독서기록은 상당히 자세히 남아 있는데이를 보면, 이 양반은 나이가 상당히 먹을 때까지도 중용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한편 쇄미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명색이.. 2025. 8. 27.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40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