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 2291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6) 자격루를 넘어 흠경각으로 6. 자격루를 넘어 흠경각으로 자격루를 제작한 장영실은 이번에는 다른 시계 제작에 나선다. 세종 20년(1438) 1월 7일 기사 중 하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세운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다. 이를 기념해 세종은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그 기념비를 쓰게 하니 그 중 한 구절이다.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 2023. 12. 20.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5) 테크노크랏의 전성시대 5. 테크노크랏의 전성시대 이를 즈음해 그 전후 약 10년이 내가 보기에는 장영실의 전성시대다. 바로 앞에서 말하는 자격루는 실제는 2년 뒤인 세종 16년, 1434년 7월 1일을 기해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해 쓰기 시작했다. 이 보루각 위치를 나는 모르겠다. 아마 경복궁 근처 어디일 것이다. 이 날짜 실록에는 “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漏器)를 썼다”고 하면서 그 제작 및 작동 원리를 대서특필한다. 이에서 설명하는 원리를 과학 문외한인 내가 설명할 수는 없다. 이를 현대 과학자들도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에 하나를 복원해 놓았다.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는 보루각(報漏閣)이라는 곳에다가 설치했다. 그러고는 지금의 천문연구원에 해당하는 서운관(書雲觀) 관리들에.. 2023. 12. 20.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4) 자격루 제작과 출세길 4. 자격루 제작과 출세 세종은 재위 15년(1433) 자격루를 제작한다. 그 아이디어는 놀랍게도 세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격루란 물시계 일종이다. 그 원리는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종이 제아무리 명민한 군주라 해도 그는 설계자였지 제작자일 수는 없다. 그 아이디어와 설계도를 실제로 구현할 인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장영실이 맡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하니 당연히 포상이 따라야 한다. 이해 9월 16일자 다음 기록은 그 포상을 정리한 것이다. (임금이)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 2023. 12. 19.
[화랑세기 트라우마] (1) 용수-용춘의 문제 화랑세기 출현 이후 한국고대사학계, 특히 신라사학계에는 ‘화랑세기 트라우마’에 견줄 수 있는 현상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용수龍樹-용춘龍春 문제다. 두 이름은 김춘추 계보를 논하면서 그 아버지로 등장하는 표기로,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이 두 표기를 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뜻밖에도 이 둘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다. 한데 이에 놀란 사람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 두 표기가 등장하는 맥락을 다시 살피니, 정말로 딴 사람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이렇게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집필진이 용수-용춘을 딴 사람으로 인식했느냐 하는 논란이 있다. 나는 적어도 삼국사기는 그랬다고 본다. 하지만 집필진이 그렇게 인식했건 아니했건, 이건 중요하지않다... 2023. 12. 19.
말과 소가 세트를 이룬 북위시대 귀인 행차 신동훈 교수 관련 글들, 그리고 그에 대한 바로 앞 코리끼표 명나라 만력제 행차와 연속하는 관점에서 북위시대 귀인 행차를 새삼 소개한다. 북위는 널리 알려졌듯이 북방 선비족이 이룩한 왕조로, 지금의 중국 동북방에서 밀고 내려와 세력을 확장하다 지금의 산서성 북쪽 대동大同에서 통일 왕조를 이룩하고는 이내 우리도 변방에서는 살 수는 없다 해서 낙양으로 천도하고는 중국 북방을 통일한다. 선비족은 본래 유목 부족이다. 그래서 말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그들도 느긋한 행차에 쓰는 수레는 소를 썼다. 말은? 전쟁통에는 당연히 전투에 말을 썼다. 이 전쟁통도 우마 쓰임새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군량미나 무거운 무기는 모조리 소가 옮겼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전쟁통에도 말과 소는 언제나 세트로 움직였다... 2023. 12. 19.
소가 끌다 코끼리로 교체된 명나라 황제의 수레 요새 신동훈 교수께서 맹렬히 우리가 흔히 마차馬車로 아는 것이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니라 실은 소가 끄는 우차牛車일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을 연속으로 쓰고 계신 바 간단히 그 맥락을 추리자면, 귀인貴人으로 분류할 만한 돈께나 있는 사람들은 나들이에 말을 이용하지 않았고 소를 이용했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 말을 타지 않았는가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군인들은 당연히 말을 탔다. 소 타고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날렵함을 무장해야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말이 도입되고서는 탔다. 하지만 그런 시급성을 다투지 아니하는 사람들한테, 또 말 타기에는 아무래도 서툴 수밖에 없는 사람들한테 말은 굉장히 위험한 교통수단이었으니, 낙마사고로 죽는 일이 그리 많았으니, 이는 요새 교통사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2023. 12. 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