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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22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 마을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공간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으로 나뉩니다. 여기에 한성부의 행정편제로 도성 안팎 지역에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오부五部를 두었습니다. 한편 한성부의 공식 행정 구역인 오부와는 별개로 도성 안은 지세地勢와 수계水界를 중심으로 북촌北村·남촌南村·중촌中村·동촌東村·서촌西村(웃대)·아랫대의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백악산 아래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을 북촌, 남산 북쪽 기슭 아래를 남촌,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을 중촌, 경복궁 서쪽의 개천 상류 지역을 서촌(웃대),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지역을 아랫대,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이라 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자연 경관과 입지 조건, 거주자들의.. 2023. 10. 29.
한양의 궁궐들 경도京都의 시설 중 가장 중요한 공간은 궁궐이다. 경복궁은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처음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었다. 그 후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새로 지었다. 창경궁은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이 거주할 목적으로 지었던 수강궁 터에 성종이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를 위하여 건축한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창덕궁이, 1616년(광해군 8)에 창경궁이 재건되었다. 법궁인 경복궁은 이때 재건되지 않고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경희궁은 1616년(광해군 8)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원종으로 추존)의 옛 집에 세워진 궁궐이다. 경희궁이 창건되면서 법궁은 창덕궁, 이궁은 .. 2023. 10. 29.
조선왕조의 중추, 궁궐과 육조거리 수도 한양은 유교적 도시계획의 기본원칙에 따라 계획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왕이 거주하는 궁궐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종묘·사직, 국가 통치를 위한 관청거리를 조성했습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공간이며, 신하가 임금을 뵙고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선포하는 통치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한양의 도시구조는 궁궐을 축으로 형성되고 운영되었습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을 내고 좌우에 의정부, 육조를 비롯한 국가 경영의 핵심 관청들을 배치하여 육조거리를 조성하였습니다. 육조거리는 궁궐과 연결되는 어가御街인 동시에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8도로 들고나는 모든 도로의 원점이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 왕권의 상징이자 국가 통치의 중추 공간이 완성되었습니다. Royal Palace .. 2023. 10. 29.
수도방위체제의 확립과 경도京都 - 사도四都체제 수도방위체제의 확립과 경도京都 - 사도四都체제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을 오위五衛로 구분하여 방어하던 군사체제는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급기야 왜란 중에 영의정인 유성룡의 건의로 수도경비를 위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어 국난 극복을 도모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안주 등 국경의 주요 산성에 배치된 조선군을 우회하여 직접 한양에 침략하였고, 그 결과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 조정에서는 국방에서 국경방어보다는 수도방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자각 하에 수도방위체제의 확립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인조 때에는 친위군 및 경기도 방위 군대를 각각 어영청과 총융청으로 재편하고 수어청을 설치하였습니다. 숙종 때에는 금위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훈련도감과 함께 오군.. 2023. 10. 29.
신라 화랑은 오두미도 도교 교단 지도자 신라 화랑은 천사도(오두미도) 계열 도교 교단이다. 도교 교단이라는 사실은 화랑세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그 창설 및 운영과 관련한 기록들을 보면 모조리 오두미도 교단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다. 이것이 화랑세기와 관련해 중요한 이유는 그 명명백백한 사실이 화랑세기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도교의 道자도 모르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신라 화랑 관련 기록에 도교 흔적이 완연하나, 그건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중국식 도교 용어를 빌려 표현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진단뿐이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은 셈이다. 원광 법사도 애초에는 오두미도 교단 사제였다. 이건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명백하다. (2017. 10. 29) *** 신라 화랑이 이끄는 무리가 오두.. 2023. 10. 29.
정창원 고문서 제첨축 보며 자아비판한다 정창원 고문서 중 하나로 그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여기선 양식만 주목하기 바란다. 두루마리 문서다. 닥종이에 쓴 공문서. 문젠 말아 놓은 상태로 보관했다가는 무슨 문서인지 나중엔 알 수 없다는 거. 인덱스가 필요한데 그걸 두루마리 문서에선 저런 주걱모양 나무꽂이를 썼다. 이를 제첨축이라 한다. 함안 성산산성 6세기 신라 목간에서 제첨축이 확인됐다 해서 난리친 적이 있다. 그 난리는 내가 일본측 연구자 이성시 히라가와 미나미랑 주동했지만 그러면서 신라문서행정 고도화 운운했지만 다 개뻥이었다. 왜 신라가 저 시대에 문서행정을 안했다 생각하는가? 그 점에서 저 제첨축은 신라 원시미개주의 발로였다고 자아비판한다.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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