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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사마정(司馬貞)과 《사기색은(史記索隱)》 사마정(司馬貞)은 사마천(司馬遷) 불후의 저작인 《사기(史記)》에 대한 주석으로 시도한 완성물인 《사기색은(史記索隱)》 저자이나 이상하게도 행적은 불비하기 짝이 없다. 생년은 물론이요 몰년도 모조리 미상이다. 관적(貫籍)은 회주(懷州) 하내(河內)이며, 당 玄宗 개원(開元) 연간(713~741) 초기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으며, 이후 윤주별가(潤州別駕)와 굉문관학사(宏文館學士)를 지낸 이력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史記索隱》 외에 《補史記(보사기)》가 있다고 하며, 《전당문(全唐文)》 卷402에 그의 산문이 수록된 정도다. 이런 가운데 그의 행적은 《신당서(新唐書)》 卷132 유자현전(劉子玄傳)에 찔끔 보이며, 그 외 북송시대 도서목록집인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卷4에도 역시 간략한 기술이..
두헌(竇憲. ?~92)과 당고지금(黨錮之禁) 두헌(竇憲)은 字가 백도(伯度)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이다. 두융(竇融)의 증손으로 후한시대에는 외척으로서 要職을 역임했다. 후한 建初 2年(77), 황제 장제(章帝)가 두헌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세우자 외척으로서 동생인 두독(竇篤)과 더불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을 사서에서는 “賞賜累積, 寵貴日盛, 自王․主及陰․馬諸家, 莫不畏憚”이라 적었다. 황제가 내린 상이 쌓이고 총애가 날로 깊어지니 왕 이후 권세가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永元) 元年(89), 竇憲은 刺客을 보내 太后 총신인 유창(劉暢)을 살해하고는 그 죄를 채륜(蔡倫)에게 덮어 씌우려 하다가 나중에 일이 발간되어 宮廷에 감금됐다. 후한서 두융전(竇融傳..
신라 금석문의 주소지 공개와 호구조사 포항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그 자리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울진 영일 냉수리비는 얼마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였다. 그 건립시기가 최종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서기 503년, 지증왕 4년이라고 많은 이가 받아들인다. 이 영일 냉수리비에는 신라인 이름 얼추 25명이 나온다. 과거 왕이 2명이요, 현재 살아있는 갈문왕이 1명, 기타 이 갈문왕과 더불어 진이마촌이라는 동네에서 벌어진 아마도 재산 관련 분쟁 판결에 관여한 다른 신료 6명,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부관이었을 공산이 큰 실무 관료 7명, 그리고 비문 작성에 관여했을 법한 실무관료, 그리고 진이마촌 행정책임자인 촌주 등이다. 이들 25명에게는 모두 그 주거지를 밝혀놓았다. 심지어 신라왕과 갈문왕조차도 주거지를 다 밝혀놓았다. 이에 ..
긴장을 계속하는 나당관계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개가 주인을 무는 법입니다." 다시금 찬찬히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읽다가 마주한 대목이다. 백제를 멸한 당이 이번엔 함께 백제를 정벌한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감지한 신라 조정에서 대처 방법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겨냥해 김유신이 한 말이다. 이 대목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中)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당이 백제를 멸하고는 사비(泗沘) 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 침공을 은밀히 도모했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는 여러 신하를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꾸며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잡간迊干, 혹은 잡찬迊飡과 소판蘇判 ‘迊’이라는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淸代에 완성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보면, 이 글자를 【酉集下】 【辵部】에 배치하면서, 그 발음은 《광운廣韻》을 인용해 ‘子와 答의 반절(子答切)’이라 하고, 이어 《집운集韻》을 응용해서는 발음은 ‘作答切’이라 하면서, “帀라는 글자와 같다. 두루 갖춘다(혹은 두른다)는 뜻이다. 止를 거꾸로 세워 帀이다. 더러 ○라고 쓰기도 한다(同帀。周也。从反之而帀也。或作○)”고 했다. 나아가 《正韻》을 인용해서는 “세속에서는 잘못 써서 匝이라 쓰기도 한다(俗譌作匝)”고 했다. ○는 자판에서 글자가 지원되지 않지만 ‘迊’이란 글자에서 책받침 안 글자 ‘帀’이 ‘市’인 글자다. 이로써 보건대 ‘迊’이라는 글자는 발음으로는 ‘잡’이고, 뜻은 ‘周’, 곧 ‘빙 두..
월함산(月含山) vs 함월산(含月山) vs 토함산(吐含山) 이 석가탑중수기는 내가 2005년 9월 14일에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 발견, 보존처리 중'이라는 제하 기사로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존재를 알린 데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문서 검토 또한 내가 가장 먼저 손을 댔으니, 2007년 3월 신라사학회가 개최한 제59차 학술대회에서 안승준과 공동으로 발표한 '釋迦塔(无垢淨光塔) 重修記에 대한 초보적 검토'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직후 신라사학회 기관지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국립박물관은 이 보도에 할 수 없이 전체 중수기 중 달랑 석장만 공개했거니와, 첨부사진은 그 석장 중 하나이니, 이 석장짜리로 진행한 검토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서 적지 않은 발견을 했다고 자부했거니와, 그러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의아스런 대목이 고려 초기 현종시대..
묘자리 파다가 발견한 고려시대 무덤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기 전, 가끔 그 전초로 볼 만한 일이 있었으니, 그 남상을 이루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이 도굴이다. 하지만 도굴이 아니라 해도, 실로 우연한 발굴이 더러 있었으니, 조선말 영의정까지 역임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3권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에 '팔각경(八角鏡)'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글 역시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김상고당(金尙古堂 김광수(金光遂))의 손자 김노종(金魯鍾)이 그 형 태인군(泰仁君) 김만종(金萬鍾)을 장단(長湍) 산속에 장사 지내려고 묏자리를 파다가 옛사람의 순장물과 송(宋)나라 동전을 발견했다. 송나라 동전이 수백 개인데, 모두 원풍통보(元豐通寶)이니 곧 청묘전(靑苗錢)이었다. 팔각경 한 면에 ‘호주진정석념이숙조자감인면청여명..
“김유신, 당신이 밉소” 천관녀의 원망 2005.04.02 14:19:46 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 상·중·하 전 3권 중 中卷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김유신(金庾信)은 계림인(鷄林人)이다. 사업(事業) 혁혁(赫赫)하니 국사(國史)에 펼쳐져 있다. 아이 때 모부인(母夫人)이 매일 엄훈(嚴訓)하면서 망령되게 교유(交遊)하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우연히 여예(女隸) 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어미가 그를 면수(面數·면책)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주야로 네가 성장(成長)하여 공명(功名)을 세워 임금과 부모에게 영화가 있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는 술파는[屠沽] 애들과 음방(淫房)과 주사(酒肆)에서 유희(遊戱)하느냐’ 라고 하고는 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즉시 어미 앞에서 스스로 맹서하기를 다시는 그 집 문을 지나지 않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