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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시들의 우두머리 尙膳(상선) 조선시대 사극이 안방극장을 범람하면서 그 시대 내시 관직으로 젤로 익숙한 이가 이 상선이 아닌가 한다. 상선을 보면 나이 지긋하고, 그러면서도 내시 직급 중에서는 아주 혹은 젤로 높은 존재로 등장하곤 한다. 그렇다면 尙膳이란 무슨 뜻인가. 이 점이 궁금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우선 이 말이 동사+목적어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는 膳을 尙하다는 뜻이다. 이런 동사구가 그대로 명사구로 전환해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尙을 해명하기 전에 우선 膳을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唐韻》常衍切 《集韻》《韻會》《正韻》上演切,音善。《說文》具食也。《徐曰》言具備此食也。庖人和味,必加善,胡从善。《韻會》熟食曰饗,具食曰膳。《周禮》鄭註:膳之言善也。今時美物曰珍膳。《前漢·宣帝紀》其令大官,損膳省宰。《註》膳..
논어, 공자의 말씀? 시대가 원한 공자의 말씀? 《논어論語》...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논어》는 사골국과 같다. 이를 정리한 이들이 언제의 누구인지 말이 많거니와 이에 대해 오직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만을 子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공자의 재전재자 그룹 중에서도 유자와 증자의 제자들이 정리했다는 설이 제일로 그럴 듯하게 통용한다. 그렇다면 《논어》가 저록한 공자의 말씀은 실은 공자의 음성에서 한참이나 멀어졌으니 엄밀히는 유자와 증자를 통해 기억에서 살아남은 잔재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 엄밀히는 공자는 이미 뼈조차 삭아없어졌을 시기에 그런 스승들을 통해 겨우 살아남은 편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부처의 말이 각종 경전에 의하면 입멸 직후를 비롯해 몇 차례 소위 결집이라는 형태로 정리가 이뤄졌다 하지만, 현재 우리한테 주어진 ..
“일찍 죽지마라, 너만 손해다” 이런 비스무리한 말을 중국사상사 전공 故 김충렬金忠烈 선생이 한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인즉슨,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니, 곽점초간郭店楚簡 같은 신출토 문물을 나보다 일찍 죽은 사람은 못 보았으니, 나는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한데....상서尙書, 일명 서경書經이라는 이름으로 유통하는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절대 윤리헌장 현존본이 몽땅 가짜임을 증명함으로써 동아시아 전체 지식인 사회를 멘붕에 빠뜨린 염약거(閻若璩, 1636~1704)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배움은 끝이 없으니 사람이 더욱이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그의 《잠구차기潛丘劄記》에 나온다.
단군조선 이래 첫 도시재생의 총구를 당긴 대통령각하 지시사항 신라고도(新羅古都)는 웅대(雄大), 찬란(燦爛), 정교(精巧), 활달(濶達), 진취(進取), 여유(余裕), 우아(優雅), 유현(幽玄)의 감(感)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再開發) 할 것. 1971. 7. 16. 당시 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지시사항'에 따라 한국은 난생 처음으로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는데, 그 대상지는 신라 천년 고도 경주였다. 우리한테 도시재생사업은 요새, 더욱 구체적으로는 문재인 정부 들어 비로소 본 궤도에 올랐지만, 그 선하先河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가 주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었다. 박정희가 탕탕탕 김재규 총성에 쓰러지기까지 계속한 이 사업은 1. 보문관광단지 개발 2. 신라 유적 정비 이 두 가지를 근간으로 삼거니와, 이 사업을 통해 우리가 아는 천년고도 경주가 비로..
지리산에서 기르는 호연지기? 중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쿠션 여행 본관이 남원(南原), 자(字)가 자점(子漸), 호(號)는 제호(霽湖)ㆍ점역재(點易齋)ㆍ요정(寥汀)ㆍ태암(泰巖)인 양경우(梁慶遇, 1568~1638)는 부친과 더불어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로가 인정되어 서얼임에도 30세인 선조 30년(1597)에 참봉으로 문과 별시에 급제하고, 광해군 8년(1616)에는 문과 중시에 뽑혔다. 다만, 신분에 따른 차별은 많았던 흔적은 농후해 결성(結城)ㆍ해미(海美)ㆍ장성(長城) 현감 같은 낮은 급 지방관을 전전하고, 내직으로는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와 봉상시 정(奉常寺正)을 지냈을 뿐 고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시문에 뛰어나다 해서, 그런 쓰임이 있을 때는 중용받기도 했다. 양경우는 지금의 전라도 장성 땅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오산현감(鰲山縣監)으로 재직 중이던..
"갈승개(曷勝慨)", 팔순 영조의 한탄 늙으면, 특히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할수록 강개(慷慨)함을 이기지 못하기는 만승(萬乘), 혹은 천승(千乘)의 군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지위와 권력이 높을수록 이 강개함은 더 농밀한 모습을 그런 일에 처한 사람들이 더 보이는 듯하다. 나야 그런 처지가 아니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 숙종 20년(1694)에 나서 이복형 경종이 죽자 1724년 왕위에 올랐다. 1776년까지 재위하다가 죽었으니, 재위 기간이 물경 만 52년에 달하고 향년 또한 만 82세 기록적인 장수를 기록한다. 이름이 금(昑)이지만, 아마 이 본명으로 불린 일은 여든 생평에 몇 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숙종 혹은 형 경종 정도가 "금이야" 하고 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피붙이요 적자이며 차..
준천계첩浚川稧帖, 청계천 준설을 향한 영조의 위대한 여정 어쩌다 영조한테 꽂혔다. 그렇다고 내가 동전 넣으면 자동으로 무엇을 언제나 새롭게 뽑아내어 주는 벤딩머신도 아닐진댄, 지난날 내가 고혈을 뽑아내 만든 기사 중에 현재도 나름 요긴하다 하는 것들을 재방함으로써 그에 갈음하고자 하니, 뭐 재방송 우라까이는 OCN 슈퍼액션만 하란 법 있는가? 이참에 소개코저 하는 그와 관련한 사건은 청계천 준설이라, 이 사업을 영조 자신이 얼마나 국정 최대 현안 중 하나로 여겼으며, 그것을 이룩한 자신을 얼마나 대단히 여겼는지는 앞선 이 블로그 글에서 충분하리라 본다. 청계천은 걸핏하면 범람이지만, 문제는 이는 비가 올 때 얘기고, 갈수기엔 바닥을 드러냈으니, 똥물 범벅이었다. 당시 상하수도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거나 운영됐을 리 만무했거니와, 똥물에 갖다 버린 시체 썩는 냄새..
영조 자신이 내세운 재위 50년의 치적 6가지 앞 사진은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 영조친필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하는데, 관리처일 뿐이고 실제 주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원래 관리처는 문화재관리국, 즉 문화재청이 위탁관리케 한 것이다. 제왕은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되어야했기에, 비단 영조만이 아니라 조선 역대왕 글씨를 보면 대체로 서예미랑은 전연 거리가 멀어, 멋을 부리지 아니했으니, 그런 점에서 영조 역시 어긋남이 없다. 가끔 글씨 잘 쓰는 임금놈이 있는데, 틀림없이 제왕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탱자탱자 놀다가 엎혀서 느닷없이 왕이 된 경우에 그러하다. 내 보기엔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영조는 세종에 버금하는 성군이다. 그의 손자 정조가 비길 바가 아니다. 나아가 단군조선 이래 가장 노회한 군주로 나는 서슴없이 영조를 꼽는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