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763 울릉도는 공도空島가 아니라 왕화王化 밖이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 시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에 수록된 울릉도설蔚陵島說이라는 논설이다.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지 모른다. 매년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바다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으로부터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저편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召公臺에 오른 이들은 더러 이 섬의 숲과 묏부리의 형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으니, 이로써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루나 사슴, 갈대, 대나무 따위가 왕왕 바닷가 백사장에 떠밀려 오고, 이름 .. 2024. 1. 31. 쏜살 같은 도망길, 돌아올 땐 장가도 가고 느릿느릿 고려 현종 밤에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보름 만에 나주까지 줄행랑을 친 고려왕 현종 왕순. 따라오지도 않는 거란군을 피해 도망다니다, 돌아보니 거란군은 흔적도 없어 쑥쓰러워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젠 가오를 생각할 때였다. 1010년 1월 13일일 노령을 넘어 나주에 도착하고서는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맥이 풀렸는지, 아니면 이젠 온 김에 좀 쉬고 가야 한다 생각했음인지, 거기서 물경 8일이나 퍼질러 놀다가는 21일 을미乙未가 되어서야 행장을 꾸려 북상을 시작하는데 앞서 본 남행 도망길과 이제 시작하는 복귀하는 길은 조금 달랐다. 그만큼 여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이제는 민심을 다독일 때가 된 까닭이다. 도망길이 순행길이 된 희유한 케이스가 바로 현종의 피난길이었다. 귀경길에 오른 그는 첫.. 2024. 1. 31. 페라리 타고 도망가던 현종, “너무 왔나?” 앞서 보았듯이 코앞까지 밀어닥친 거란군을 피해 고려 현종 왕순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壬申, 양력 2011년 2월 3일 남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드라마는 현종이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려다가 할 수 없이 피했다고 해서 고뇌에 찬 군주의 모습을 그렸지만, 실상은 전연 달라 이날 밤 몰래 후비后妃 몇 명과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을 포함한 금군禁軍(궁궐 수비대) 50여 인과 더불어 아주 단촐한 규모로 경성을 빠져나갔다.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꼼수였다. 밤새 달린 현종은 이튿날인 1010년 12월 29일 계유季酉에는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이란 곳에 이르고 다시 그곳을 떠나 날이 저물어서야 창화현昌化縣이란 곳에 이르렀다. 앞 지도를 보면 이날 임진강을 도하했음을 본다. 아마 그쪽 현 치소에서 머물.. 2024. 1. 30. 남쪽으로 튄 현종, 보름 만에 날아서 나주에 닿다 성종이 친정한 이른바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결국 개경까지 함락 당할 위기가 닥치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일에 남쪽으로 줄행랑치기 시작해 1011년 1월 13일 정해丁亥(양력 2월 18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입성하니 개경 출발 기준 불과 보름 만이었다. 왕의 행차가 이렇게 빠를 수는 없으니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줄행랑이었다. 예서 궁금증. 남쪽은 고려시대 당시에도 개경을 기준으로 삼아 크게 두 가지 통로가 있었다. 나주로 곧장 남진하는 코스와 소백산맥 넘어 경주 방면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두 길은 천안, 구체로는 갈기비가 있는 데서 갈라진다. 현종은 단 코스를 선택했다. 왜? 저 코스는 전반으로 보아 평탄하나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천안.. 2024. 1. 30.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저 강동육주江東六州라는 말은 전통시대 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못내 옛날부터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대로 저 시대 역사를 설명할 때는 편리한 점이 많아 그대로 따르기는 했지마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우리한테 각인한 이미지는 서희라는 세 치 혀로 무장한 뛰어난 고려시대 외교관이 80만 대군이라 설레발 친 거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지어 그 자리서 저 땅을 받았다고 하지만 천만에. 당시 양쪽 조정을 대표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밀실 야합이 있었는지는 고려사(절요 포함)와 요사 모두 침묵하지만, 이후 전재된 양상으로 보건대 명확해서, 또 많은 이 시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고려는 송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끊고 이제부터는 거란을 종주국으로 섬겨 요나라에서 조공 책봉을 받겠다. .. 2024. 1. 30. 조선의 건국, 왕후장상을 씨로 따지는 시대의 개막 거리마다 외국산 상품이 넘쳐나는 시대가 있었다. 해마다 외국 상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가 있었다. 장사로 떼돈 버는 사람도 생겼다. 언감생심 출세는 꿈도 꾸지 못할 사람들이 불알 짤라 출세하고 소 잡는 백정하다가 벼락출세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들은 당당히 외쳤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으리오? 이런 시대 카니벌이 있었다. 모인 군중은 툭하면 삼만이요 많으면 수십만이었다. 한데 혁명이 일어나 느닷없이 외국산 수입 전면 금지 조치를 내렸다. 원리주의자들이 등장해 세상은 썩었다고 성토하면서 농업만이 살 길이라고 설레발을 쳤다. 군중 집회 역시 전면 금지되었다. 이로써 한국사는 오백년을 후퇴했다. 저 싸가지 없는자 수괴가 이성계요 정도전이다. 저들이야말로 수구반동이다. (2016. 1. 30) *** 좀 과.. 2024. 1. 30. 이전 1 ··· 231 232 233 234 235 236 237 ··· 46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