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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2825

성기 노출 농경문 청동기와 나경裸耕 *** 기자가 참말로 환장할 노릇 중 하나가 자기 스스로 깨친 바를 내가 이리 밝혀냈노라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니, 이 나경이 그러했다. 아래 2005년 내 기사에서 말하는 나경 습속을 《미암집》을 읽어내려가다가 발견하고는 내가 쾌재를 불렀거니와, 이걸 기사화할 뾰죽한 방법이 없었다. 내가 이런 걸 찾고 발견했노라, 이것이 바로 농경문청동기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다고 뇌까릴 수도 있지만,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없이 잔머리 굴리고 굴리다 찾은 방식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동원하자는 생각이었다. 중박관장이라면 그런 대로 있어 보이고, 더구나 당시 이건무 관장은 주된 전공이 청동기였으니, 느닷없이 저 기사에 저리 끌려 들어왔다. 한데 이 양반 반응이다. 나중에 만났더니, 이 기.. 2020. 10. 3.
같은 말이라도 종회냐 완적이냐에 따라 평이 다른 법 종사계[鍾士季: 종회(鍾會)]가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글을 한 장 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완보병[阮步兵: 완적(阮籍)]의 글이라고 하면서 글자마다 모두 뜻이 살아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군.” 鍾士季常向人道: “吾少年時一紙書, 人云是阮步兵書, 皆字字生義, 旣知是吾, 不復道也.” [《續談助》四] 1. 종사계(鍾土季): 종회(鍾會), 삼국 위나라 사람, 종요(鍾鑑)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지(才智)가 있었다. 사마소(司馬昭)를 따라 제갈탄(諸葛誕)을 토벌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촉나라가 평정된 뒤 사도(司徒)에 올랐다. 이는 《속담조續談助》가 인용한 동진 처사東晉處士 배계裵啓 撰 《어림語林》에 보인다. 김장환 옮김을.. 2020. 10. 2.
이여가爾汝歌, 황제와의 야자타임 오吳나라 군주 손호孫皓는 자가 손빈孫賓이며, 손종孫鍾의 현손이다. 진晉나라가 손호를 토벌하여 손호가 진나라에 귀항歸降하자, 진 무제武帝[사마염(司馬炎】가 손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했다. 나중에 무제가 군신群臣과 크게 연회를 벌였는데, 그때 손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제가 손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오 땅 사람들은 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경이 한 번 지어보시오.” 손호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좋습니다” 하고서, 무제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옛날에는 자네의 이웃이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신하되었네. (자네에게 술 한 잔 올려) 자네의 만수무강을 비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했으며, 무제도 후회막급이었다. 吳主孫皓, 字孫賓, 卽鍾之玄孫也, 晉伐孫皓, 皓降晉, 晉武帝封皓爲歸命侯, 後武帝大會群臣,.. 2020. 10. 2.
“돈만 주면 잘 써주께”, 공정성 의심받는 역사가 진수陳壽 진수(陳壽)가 장차 ≪삼국지(三國志)》를 수찬하려고 할 때 정양주(丁梁州)에게 말했다. “만약 천 곡(斛)의 쌀을 구하여 나에게 빌려준다면, 틀림 없이 존공[尊公: 정이(丁廙)]을 위해 훌륭한 전(傳)을 지어 주겠소.” 하지만 정양주가 쌀을 주지 않아 마침내 그의 전이 없게 되었다. 陳壽將爲《國志》, 謂丁梁州曰: “若可千斛米見借, 當爲尊公爲佳傳.” 丁不與米, 遂以無傳. [《類聚》七十二] 1. 진수(陳壽); 자는 승조(承祚), 사공(司空) 장화(張華)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효렴(孝廉)에 천거함으로써 좌저작랑(左著作郞)에 임명되었다. 《삼국지》를 수찬했는데, 당시에 '양사(良史)'라는 칭송을 받았다. 2. 정양주(丁梁州): 정이(丁廙)의 아들, 자세한 행적은 미상, 정이는 자가 경례(敬禮)이며, 형 정의(.. 2020. 10. 1.
내가 자릴 비운 사이 있었던 일, 군산 선제리유적 검파형동기 *** 이 소식이 전해지던 그 무렵은 내가 풍찬노숙하던 시절이리라. 몸이 떠나면 맘도 떠나는 법이요,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은 소식에는 무덤덤하기 마련이라, 부러 귀를 쫑긋하지 아니하면, 그냥 지나치고 만다. 오늘 우연히 다른 내 기사들을 검색하다가 아래 소식이 걸리더라. 이 군산 선제리 유적은 아마도 발굴보고서가 정식 출간되었을 법한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래 기술에서 주목할 점은 이 검파형통기를 "가운데 마디를 일부러 부러뜨려 위쪽과 아래쪽이 나뉜 채 묻혀 있었다"는 대목이다. 이 역시 죽음을 위한 의식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건 아마도 생전에 실제 사용하던 것을 함께 묻어주면서, 그것이 죽음의 영역을 표시하고자 부러 저리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른바 훼기毁器가 이리도 중요함에도, 그에 대.. 2020. 9. 30.
빡빡이와 장발족 80년대 장발이 유행한 가장 큰 이유는 두발 자율화였다. 자율화 때문이 아니라 자율화 이전 까까머리에 대한 억압 때문이었다. 왜 머리를 까까머리로 윽박해야 했는지 흔히 군사 문화 영향을 드나 나는 그걸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관행이었다. 왜 빡빡 밀게 했는지, 자율화 시대가 되니 종래의 억압에 대한 반발이 분출했다. 그리하여 다들 보란듯이 장발로 갔다. 엿먹으라였다. 한국현대사를 기술할 때 저 두발 자율화와 교복 자율화는 유신정권 시작만큼 중요하다. 이 억압과 허용의 길항에서 또 하나 중대한 사건은 내가 군복무 시절 일어난 과외자율화다. 한국현대는 이런 제압과 규율이 빚어낸 교향곡이다. 그나저나 저 사진 속 순단이랑 동순이는 어데갔는지 모르겠다. (2018. 9. 25)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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