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164

[202405 항저우杭州풍경] (5) 장사의 신, 꽌시關係의 대가 호설암胡雪巖 옛집 by 장남원 호설암胡雪巖 (1823-1885)은 청나라 말기의 거상巨商이다.나 같은 사람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안휘에서 태어나 빈한함을 이기고 갖은 고난 끝에 항저우에서 상하이까지 그 영역을 넓혔고상인으로는 드물게 홍정모紅頂帽와 관복을 받았다고 한다. 비단사업과 약국, 무기거래, 부동산 등 다양한 업종으로 뻗어 막대한 부를 일구었으나 유럽상인들과의 알력으로 이탈리아 실크에 밀려 막대한 손실을 보게되면서 몰락하였다. 胡雪巖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胡雪巖(1823年9月29日—1885年12月6日),名光墉,字雪巖,以字行,幼名顺官,祖籍安徽绩溪,生于杭州,晚清红顶商人。杭州鼓楼现存胡雪巖故居。 胡雪巖幼年喪父zh.wikipedia.org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2024. 6. 16.
정현鄭玄이 말하는 ‘墓[묘]’ 무덤 후한 말기 각종 경전을 주석함으로써 경학經學 분야 일대 거성으로 자리잡은 정현은 그들 경전류에 보이는 墓라는 글자를 다음과 같이 풀었으니 1. 주례周禮 春官宗伯에 보이는 ‘묘대부墓大夫’라는 대목에서 墓라는 글자를 주석하기를“冢塋之地, 孝子所思慕之處” 라 했으니, 이는 무덤 땅을 믜미한다. 효자가 (조상을) 사모하는 곳이다는 뜻이다. 2.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에 보이는 구절 “適墓不登壟”이라는 구절에 주注하기를 “墓, 塋域”이라 했으니 墓란 선영의 구역을 말한다는 뜻이다. 3. 같은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에 보이는 구절 “吾聞之, 古也墓而不墳”이라는 말에서 注하기를 “墓, 謂兆域, 今之封塋也” 이는 묘란 무덤 구역을 말한다. 지금의 봉영封塋, 곧 묘역을 말한다 는 뜻이다4. 석명釋名이라는 사전 석장제釋喪.. 2024. 6. 16.
용인의 역원(驛院) : 보수원(寶樹院)의 실체를 확인하다 조선시대 용인에는 2개의 역驛과 3개의 원院이 있었다.(역은 사신이나 관리가 왕래할 때 마필을 공급하던 곳이고, 원은 공공 숙박시설, 즉 여관을 의미한다.)1. 구흥역駒興驛 : 현의 남쪽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2. 금령역金嶺驛 : 현의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구흥역과 30리 간격을 두고 있었다.(18세기 제작된 해동지도에 따르면, 구흥역에는 말이 10필, 금령역에는 말이 5필이라고 하여, 구흥역의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1. 보시원普施院 : 현의 서쪽에 있다.2. 홍화원弘化院 : 현의 남쪽에 있다.3. 금령원金嶺院 : 금령역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중 '보시원'은 서변면에 위치했는데, 지금의 보정동 연원마을 부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2024. 6. 16.
조선후기 도성 방어를 위한 경기남부 요충지 용인 석성산성 용인 석성산성은 용인시의 진산鎭山인 석성산에 위치하며, 보개산성寶蓋山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석성산’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633년의 류성룡의 『서애집西厓集』으로 1656년 『대동여지지大同與地誌』가 ‘보개산’으로 기록한 것에 비해 더 이른 시기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석성산’이라는 명칭은 17세기 초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사용되었으며,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초반까지의 관찬지리서에서는 보개산으로 지칭되는 것으로 볼 때, ‘석성산’은 속칭俗稱의 개념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성산성이 조선후기에 도성을 방어하는 경기남부의 요충지였다는 것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서애 류성룡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살필 수 있다.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 2024. 6. 16.
墓[묘]란 무엇인가? 다른 무덤과는 어디에서 만나 어떻게 갈라지는가? 墓란 무엇인가? 그 유사상품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어 그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한 이가 이미 2천년 전에 있었다. cf. 墳[분]·冢[塚, 총]·壟[롱]·丘[邱, 구]·培[배]·堬[유]·采[채]·埌[랑]·塿[랑랑]·墲[모] 양웅揚雄의 방언方言이 말하는 ‘冢[총]’(괄호안 푸른색은 곽박주郭璞注)에 대한 해설은 아래와 같다. 秦晉之間謂之墳(取名於大防也), 或謂之培(音部), 或謂之堬(音臾), 或謂之采(古者卿大夫有采地, 死葬之, 因名也), 或謂之埌(波浪), 或謂之壟(有界埒似耕壟, 因名之), 自關而東謂之丘, 小者謂之塿(培塿, 亦堆高之貌.洛口反), 大者謂之丘(又呼冢爲墳也), 凡葬而無墳謂之墓(言不封也. 墓猶慕也), 所以墓謂之墲(墲謂規度墓地也. 漢書曰:初陵之모, 是也.) 이로써 보면 墓가 무덤이기는 하되,.. 2024. 6. 16.
콩농사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을 것 필자가 이런 억측에 가까운 이야기를 과감하게 하는 이유는 뭐 콩농사가 한국에서 세계최초로 시작된 자랑스러운 역사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콩농사가 한국과 만주일대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이다. 콩농사는 단백질원이고 중요한 잡곡이긴 한데 옛날이라고 콩을 깡콩밥을 지어 퍼먹었을 리가 없다. 그건 조, 기장, 수수 등과는 달리 콩은 절대로 주곡식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깡 조밥, 깡기장밥은 먹어도 깡콩밥은 절대로 못 먹는다. 깡콩밥을 찌건 삶건 해 먹어 보면 알 일이겠다.  그러면 콩농사는 왜 짓는가? 조, 기장, 수수 등과 함께 지어 영양학적으로도 단백질을 보충해주는 보완적 의미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필자가 보기엔, 콩농사가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콩농사는 .. 2024. 6. 1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