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ESSAYS & MISCELLANIES2268 고고학과 언론, 특히 곡해하며 소비하는 엠바고에 대하여 뭐 제목이라 해서 거창하게 보이겠지만 이 얘기만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관계 잘 아다시피 복잡미묘하다. 나 개인으로 말하자면, 이때문에 인간관계까지 틀어진 일 여러 건이며, 개중 어떤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에서 고고학 관련 업무 중에서도 발굴건만 국한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첫째, 문화재청이건 사업자건, 혹은 발굴조사단이건 기본적으로 비밀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속성에 따라 그 발굴소식을 감추거나, 발표를 미뤄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 잘 알지만, 그 소식 아무리 덮어봐야 눈가리고 아옹이다. 내가 모르는 발굴소식 없다. 감추려 하지 마라. 이 정보 캐내는 방식 간단하다. 적을 치는 것이다. 그 발굴과 전연 무관계한 사람 혹은 기관을 들이치거나, 혹은 그 기관 혹은 그 기관 종사자랑 사이.. 2023. 5. 12. 대통령실 이전과 청와대 개방에 즈음한 예언, 1년이 지나서 보면? 대통령집무실 이전과 청와대 개방 이를 둘러싼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반대론....이 반대론이 두려워한 것은 환호와 갈채였다. 왜? 내가 반대하는 놈은 환호와 갈채를 받아서는 아니되므로....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국정을 망칠까바가 아니었다. 혹시 잘한다는 소리 들을까봐서다. 청와대 개방한다 해서 그리되겠는가? 청와대 개방과 국정은 별개다. (2022. 5. 10) 2023. 5. 10. 진흥왕이 순수비 세운 데가 하필 비봉인지를 제대로 물어야 한다 저 의문을 더는 미룰 수도 없고 더는 미뤄서도 안 된다. 의문이 없는 데서 무슨 창안創案이 나오겠는가? 사방을 조망하기 좋아서? 그에선 이론이 있을 수가 없다. 문제는 저런 데가 많을 텐데 하필 저 지점인가다. 이번 신영동 고려시대 건물터 너머 저 현대식 건물들 뒤쪽으로 북한산 자락이 펼쳐진다. 형제봉을 기점으로 비봉 승가사로 어어지는 산록이다. 지금은 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아니하나 이곳이 바로 정통으로 비봉이 조망하는 구기동 세검정 골짜기다. 왜 저 지점에 순수비를 세웠는가? 저 비봉에서 당시 한강 하류 유역을 다스리던 광역행정구역 치소治所가 있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치소에서는 저 비봉 순수비가 보였다. 치소도 보이지 않는 데다가 저런 중요한 기념비를 세웠겠는가? 간단하다. 이번에 고려시대.. 2023. 5. 10. 신라계 양식을 계승한 고려 삼층석탑三層石塔? 이 석탑은 상, 하층 이중 기단 위에 3개 탑신석塔身石과 3개 옥개석玉蓋石으로 구성된다. 각 층 옥개석에는 야트막한 받침이 표현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간략한 보주寶珠 형태로 마감되었다. 전체 모습에서 신라계 석탑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 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여 전통문화대학 교정에 선 이 석탑을 저리 설명하거니와 비단 저 탑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고려시대 탑파에는 관성으로 신라석탑을 계승한 고려 석탑 운운하는 대목이 보인다. 미안하나 저 말 하나마나요 그래서 췌언贅言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지 350년 전에 고구려 백제를 계승했겠는가? 고려가 고구려 후예를 표방했지만 그건 반란을 획책한 땅이 옛 고구려 영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지 그 직접 자양분은 신라일진댄 그들이 무슨 용가리.. 2023. 5. 9. 벌통 깨부셨다는 반달반달곰 또 역마살 도진 반달곰 '오삼이'…충북 영동에 다시 출현 송고시간 2023-05-05 10:03 4일 오전 민주지산 나타나…"마주치면 뒷걸음질로 자리 떠야" 또 역마살 도진 반달곰 '오삼이'…충북 영동에 다시 출현 | 연합뉴스(영동=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지리산서 태어난 뒤 서식지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 중남부를 광활하게 떠돌고 있는 반달가슴곰 '오삼이'(코드번호 ...www.yna.co.kr 매양 하는 말이지만 사라진 것은 사라진 이유가 있으니, 그 이유가 인위일 때 복원의 본능이 특히 강해서 인간의 무지 혹은 욕심이 아니었던들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내 탓 공방을 하며 우리를 자책한다. 하지만 없어진 그 과정이 자연도태일 수도 있고, 섭리일 수는 없는가? 이건 그런 자택에 따라 복원한 그 새로운.. 2023. 5. 6. 김유신이 계백한테 초장에 네 번 당한 이유는 5만이라는 덩치 때문이었다 신라가 백제를 들이칠 때 동원한 군사는 물경 5만이었으니 이런 대규모 군사 동원은 기원전 57년 혁거세에 의한 신라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그 구성 내력을 보면 어중이떠중이 집합소였다. 그 총사령관 김유신은 백전노장, 신출귀몰했지만 이 어중이떠중이는 골차 아프기 짝이 없었으니 덩치만 큰 코끼리 하마 기린이었지 날렵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어 쪽수는 오천밖에 되지 않으나 해병대 udt 같은 훈련을 받고 상명하복이 철저한 계백이의 치고빠지기에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다. 황산에서 만나 네 번 접전했다가 네 번 내리 패한 김유신은 패인 분석에 골몰했으니 그 문제가 바로 쪽수 덩치에 있음을 절감하고는 계백이의 강점을 그대로 파고들었으니 오천으로 오만을 맞선 그 전술을 뒤집어 희대의 전술을 개발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 2023. 5. 5. 이전 1 ··· 135 136 137 138 139 140 141 ··· 37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