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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5대조 잡간匝干 마질차摩叱次는 누구? 신라 원성왕 김경신의 5대조로서 생전 최고 관위가 잡간임을 확인할 뿐, 그 외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원성대왕元聖大王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지금의 숭복사崇福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 훈입訓入 잡간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議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 법선法宣 대아간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이것이 삼국유사가 말하는 원성왕 계보인데, 아쉽게도 마질차가 누구이며, 그런 마질차는 또 선조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이런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즉 이.. 2024. 3. 6.
목판 활자 필사본 동아시아에서 이 세 가지 책 제작 매체는 시간 순으로 하나씩 발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상황에 따라 병렬적으로 발전하였다. 목판은 대량생산의 수요가 있는 중국. 활자는 굳이 한국에서 발전한 이유는 딱 그 독서층의 수요 때문이다. 일본에서 필사본이 주류를 이루다가 임란 이후 처음에 활자로 개판한 것은 결국 독서층의 당시 수요를 반영한 것이고 이후 목판으로 전환한 것은 독서층의 증가를 의미한다. 목판, 활자, 필사본은 그 사회의 독서수요에 따른 변용이다. 어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발전을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다. 필사본, 목판, 활자로 발전하여 활자가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2024. 3. 6.
깐족대다 6년간이나 고려에서 억류생활한 거란 사신 지랄리只剌里 앞서 고려거란전쟁 와중에 하공진이라는 고려 충신이 있었음을 보았거니와, 그와 비슷하게 상대 진영 고려에 전권특사로 갔다가 6년간이나 억류생활을 한 거란 조정 신하도 있다. 이 일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과 거란측 증언인 요사遼史에 모두 남아있지만, 문제는 단순히 표기가 다른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정체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위선 고려 측 기록을 본다.그에 의하면 1013년, 그러니깐 거란에서는 성종 야율륭서 개태開泰 2년, 고려로서는 현종 4년 3월 17일에 거란에서 사신으로 좌감문위 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이라는 이가 와서 흥화興化를 비롯한 6개 성을 빼앗은 일을 질책하더니, 같은 야율행평이 석달 뒤인 같은 해 1013년 7월 18일에 다시 고.. 2024. 3. 6.
당최 안 보이는 소주의 흔적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구해 읽을 수 있었다. 왜 이를 찾았느냐 하면, 이 의서에 '소주'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향약구급방은 발간 상한선이 고려 고종 연간이라 하니 어쩌면 우리나라 '소주'가 몽골의 영향 이전에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도통 '燒酒'란 말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성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당시에 '酒'와 '淸酒'가 구분되었다든지, '溫酒'에 약을 타서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든지 하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근데 '소주'나 소주를 의미하는 듯한 문구는 당최 안보이는데....그 이야기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아는 분은 어느 대목에 소주가 등장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에는 '소주'가 안보인다. 막걸리는 '백주白酒'라고 해서 나오지만서도. 아마도 '백주'는.. 2024. 3. 6.
[백수일기] 부담스런 점심 약속 백수에 적응하면 거개 오전을 거니하게 뻗어잔다. 백수란 야행성 내지 새벽형이라 이 긴 밤을 이런저런 소일거리로 때우게 되는데 그래서 점심 약속이 매우 부담스럽다. 왜? 그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기가 고역인 까닭이다. 그래서 백수한테는 하루가 짧다. 점심 무렵 일나서 어영부영하다 보면 금방 해가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백수가 낫다. 2024. 3. 5.
SCI 논문 쓰느라 날 샌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한문 읽는 건 둘째 치고 한문으로 글 짓고 동문선 백 이십 몇 권을 쉽게 보는 것을 많이 보는데,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는 한문 때문에 나라 망했다. 한문 익히고 쓰는 그 노력의 10분의 1만 국문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으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100배는 많은 인문적 자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도 SCI 논문 한 편 쓰려면 머리털 다 빠지는데 조선시대에 한문으로 글 짓고 시 쓰고 동문선에 왕조실록에 고려사 도대체 왜 그렇게 한문에 집착해야만 했을까? 딴 거 없고, 과거제 때문이다. 과거제의 시험과목이 딱 정해지면 식자층은 거기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 조선시대 내내 사림들은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했지만 문과는 고사하고 사마시라도 붙으려면 과거 시험 공부를 안 하면 어쩔 건데? 젊..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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