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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벌을 반대한 소적렬蕭敵烈 날로곤涅魯袞 열전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소적렬蕭敵烈은 자가 낱로곤涅魯袞이다. 재상 소달렬蕭撻烈의 4세손이다. 식견과 도량이 크고 원대하여 향리에서 받들었다. (관직 진출) 처음에 우군창사牛群敞史가 되었는데 황제가 그가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러 입시하게 하고는 나중에 국구상온國舅詳穩으로 옮겨 주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황제가 어러 신료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康肇가 그의 군주 송誦(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그의 족형 순詢(현종)을 세우고는 그의 재상을 하고 있으니 그를 대역으로 처벌해야 한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상을 물어야 할 것이다”고 하니 여러 신료가 모두 그래야 한다 했다. (하지만) 소적렬이 간언하기를 “나라가 해마다 정벌하느라 사졸이 지쳐 있고 나아가 폐하도 상중이십니다. 올 농.. 2024. 1. 7.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와 병사 수, 그리고 훈련도감 간단히 적어둔다.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에서 1석은 남성 성인 1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이다. 막번시대 일본에서 가장 큰 번이 가가번加賀藩이었다고 하는데 가가번은 호왈 가가백만석이라고 해서 백만석짜리 번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믿어 본다면 이 번에서는 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 수는 어떨까? 100석당 병사 1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가번의 경우 가용 병력은 1만 명인 셈이다.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은 병력 증감이 있었는데 대략 5천명선이었다고 하니 일본으로 친다면 50만석 짜리 번이 유지할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시 파악하고 있는 인구가 6백만선이었다고 감안하면, 국가에서 6만 병력은 유지가 가능해야 했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오군영이 그렇게 국가에 막대한.. 2024. 1. 7.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왜 없겠는가? 에도시대에 무슨 무과가 필요하겠는가? 가마쿠라 막부에 무과가 왜 필요하겠는가? 군인이라는 직역이 세습되는 사회에서는 무과란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에는 흔히 행오에서 군인을 발탁하여 썼므므로 무과가 없다 라고 하고 있다. 이게 뭐 논산 훈련소에서 뽑아 놓고 잘 뛰는 사람을 위관 영관 장관급으로 춣세시켜 썼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차피 군인은 세습했다. 그게 군인전이다. 직역이 세습되고 있었으니 무과가 필요 없는 것이다. 2024. 1. 7.
나는 옳다 해서 기사 썼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공작이라면? 기자질 하며 제일로 기분 나쁠 때가 내 기사가 내가 의도한 바와는 전연 딴판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더 기분 더러운 때는 이것이 옳은 길이요 가야 할 길이라고 해서 그쪽 방향으로 썼는데 알고 보니 이게 누군가 그쪽으로 유도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다. 문화재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몇해 전의 일이다. 서울 어느 지역 주민들이 난데없이 나를 찾아왔는데, 핵심은 인근 지역 재개발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명분이 있어야 하니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문화재 보존이었다. 문화재 기자한테 주민들이 자발로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개발을 반대한다는데 얼마나 그들이 대견해 보이겠는가? 한데 알고 보니 그 재개발지역이 이른바 서민형 임대주택 예정지였다. 반대한 이유는 자명해졌다.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다행히 저 건은 기사를 쓰진.. 2024. 1. 7.
육십이후의 전략 필자의 논문 인용 횟수 변화다. 뭐 요즘은 워낙 잘들 하는 사람이 많아 필자의 인용횟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필자의 인용횟수 변화를 보면, 2014년에 한 번, 2018년에 한 번 그리고 2021년에 반등하여 피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용횟수가 반등한 것은 사실 그보다 몇 년 전에 연구 주제의 변화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연구주제를 변화시키고 소위 말하는 current trend와의 동기화를 꾀한다. 그래야 다시 연구수준이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이게 아주 힘이 들고, 사실 사람 할 짓이 못된다. 이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인용횟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학자로서 종국에는 산송장이 된다. 필자 생각에는, 이런 변화의 모색은 나이가 들면.. 2024. 1. 7.
탁사정한테 죽다 살아난 고구려 후예 거란 외교관 고정高正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 고정高正은 어느 군郡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통화統和 연간 초기(983 무렵)에 진사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해 누차 승진해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가 되었다. 황제가 장차 고려를 정벌하려하매 먼저 고정한테 고려로 가게 해서 그 이유를 알렸다. 돌아오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마침 그때 고려왕高麗王 순詢(현종)이 표문을 올려 들어와서 친히 황제를 뵙겠다고 하니 황제가 그리하라 하고는 고정을 보내서 기병 천 명을 데리고 가서 맞도록 했다. 객관에 머물다가 고려 장수 탁사정卓思正한테 포위되니 고정이 정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휘하 장사들과 더불어 포휘를 뚫고 탈출을 감행하다 사졸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황제가 경솔하게 움직였다고 후회하면서 그의 죄를 용서했다. 이듬해 공부시랑..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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