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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선사한 정릉 원찰 흥천사의 절경 어렸을 적에 정릉동에 살았다지만, 4-5살 정도로 어린 나이였기에 당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정릉동에서 꽃병공장을 했던 우리집은 함께 일하는 삼촌들이 많았다. 엄마는 당시 매일 공장 식구들 삼시세끼 밥해먹이느라 고생했다고 그때 얘기를 할 때마다, 아리랑시장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아마도 우리집은 아리랑고개 언덕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정릉동에서 삼양동으로 이사온 이후, 그리고 용인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쭉 삼양동에 살았는데, 삼양동과 정릉동은 비교적 가까워서 마음으로는 한동네라고 생각하지만, 생활반경이 달라 자세히 돌아본 적이 없다. 물론 '정릉'이 있고, 그 원찰인 '흥천사'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가까운 곳은 발길이 잘 .. 2024. 1. 3.
어보御寶와 어책御冊, 그 아슬아슬한 관계 "어책御冊은 어보御寶에 대한 주석(annotation)이다" 얼마전 감수라는 되먹지 않은 이름으로 어보 관련 평가서에다가 내가 함부로 썼다가, 이건 아무래도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 해서 빼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다. 한데 이 말 맞는 거 같아. 명언 같아. (2016. 1. 3) *** 내 말 틀린 거 봤어? 맞어. 어보와 어책 이 둘 관계를 제대로 의심해본 사람이 없다. 어보가 추상이라면 어책은 그 추상을 해체한 구상이다. 그것을 풀어쓴 것이 바로 어책이다. 어보건 어책이건 신주神柱와 더불어 신위神位를 구성하는 삼두마차다. 실제 종묘 각 신실神室은 이 셋을 모름지기 세트로 안치 봉안해서 모신다. 2024. 1. 3.
한반도 횡혈묘橫穴墓 존재를 알린 2004년 공주 단지리 유적 촬영일자를 보아하니 2004년 4월 26일로 나온다. 공주 단지리 소위 횡혈묘 무덤 발굴성과를 공개한 날이다. 이 발굴은 한반도에서 제대로 된 횡혈묘 존재를 알린 첫 보고라는 점에서 고고학계에서는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이 횡혈묘는 영산강 유역 호남지방에서 드문드문 확인되는 전방후원분田方後圓墳과 마찬가지로 왜계倭系 특성이 아주 강한 무덤 양식이다. 다만 전방후원분과 달리 백제 왕국 핵심 지역 중 하나인 공주에서 확인된 횡혈묘가 덜 민감한 까닭은 전자는 자칫 임나일본부와 맞물릴 수도 있는 폭발성이 있는 것과는 달리, 후자는 설혹 왜인이 묻혔다 해도 공주이며, 이런 백제 중심지에 왜인들이 특정한 구역에 밀집 거주한다 해서 하등 이상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실제 기록을 봐도 백제 왕도에는 왜인 뿐만 아니라 다.. 2024. 1. 3.
부여지역 백제왕도 핵심유적 학술대회 《부여 화지산유적 조사성과와 위상》 부여군과 백제역사문화연구원이 오는 1월 12일(금) 부여박물관 사비마루에서 화지산유적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사비의 이궁(별궁)이라고 알려진 화지산 유적은 지금까지 30여년동안 발굴조사가 수행되면서 사비도성에 품격 높은 건물유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화지산을 주제로 하여 처음 열리는 학술대회로 그동안의 조사성과와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모쪼록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많은 공유는 사랑입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이상 백제역사문화연구원 성현화 선생 알림이다. 참고들 바란다. 2024. 1. 3.
얼빠진 한국역사고고학 성씨가 있고 없고에 따라 그 사회 발전 단계를 가늠하는 역사학도가 부지기 숫자에 이른다. 바둑판식 소위 방리제 혹은 조방제 시스템이 있고 없고에 따라 역사발전 단계를 가늠하는 멍청한 고고학도도 천지빼까리다. 율령이 있고 없고에 따라 그 사회 발전을 가늠하는 놈은 역사학도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는 신라사회를 구획해 그 이전을 마치 타잔이 들끓는 원시사회 보듯 한다. 중자는 당과 평성경에서 발견되는 바둑판식 도시구획이 왜 경주에서는 안 나타나거나 나타나도 촌스럽게 보이느냐고 한탄한다. 후자 역시 이를 고대 사회 성립 기점,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 그 자체 혹은 그 완성이라고 본다. 일언이폐지한다. 다 개소리다. (2016. 1. 3) 2024. 1. 3.
74년 전 보낸 아사카와 상의 새해 인사 1월 하고도 둘째 날이 되었다. 때마침 딱 이런 때 맞는 자료를 만나서 올려본다.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913년 조선에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33년간 경성에 살았다. 그러면서 그는 도예가이자 조각가, 하이쿠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고,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의 도자기와 민예품에 천착했다. 교통이 불편하던 일제강점기에 전국 가마터를 무려 700여 곳이나 찾아내 답사할 정도였다니 그 열정을 알 만 하다. 사실 노리다카보다도 그 동생 다쿠미巧(1891~1931)가 이런 면에서는 더 유명한데, 그는 아예 한복을 입고 다니며 한국인과 가깝게 지냈고 죽어서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 아사카와..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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