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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급金友伋(1574~1643) 필암서원에서 저녁에 읊다[筆院暮吟] 필암서원에서 저녁에 읊다[筆院暮吟] 저 멀리 숲에는 어슴푸레 이내 앉았고 遠樹微茫生暮烟 푸른 모래톱 흰 자갈 사이 긴 물줄기 青沙白石間長川 내 봄 시름 노래를 들어줄 사람 없어 無人聽此春愁曲 홀로 숲에서 서산에 걸린 해를 보노라 獨倚林間看日懸 김우급(金友伋, 1574~1643) 여기서 말한 필암서원은 장성읍 기산리에 있었던 것을 이른다. 장성문향고등학교가 최초의 필암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필암서원은 장성군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다가 1Km 북서쪽 황룡면 필암리 증산(甑山) 아래로 옮겼다가, 필암리 추산(秋山) 아래 중등촌(重登村: 현 중동)으로 또 옮겼으며, 마지막으로 오늘날 위치인 해타리[海村]로 옮겼다. 2020. 11. 21.
사유리가 촉발한 엄마이고 싶은 자유, 그 위대한 여정 애초 일본 출신 방송인으로 일본 국적 여성인 사유리가 국내에서는 비혼모가 되는 과정이 실상은 불법이므로, 할 수 없이 일본에 가서 씨를 받아와서 애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질 적에 이 사태가 적지 않은 후폭풍을 몰고 올 사안임을 나는 직감했거니와, 이러다가 쑥 사그라들지 모르겠지만, 이 사안이 잠재한 폭발성은 대한민국 미래를 바꿀 만하다고 나는 보았고,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양상이 전개하는 상황이다. 나는 이 사태 핵심을 누구나 엄마이고픈 사람은 엄마가 될 자유가 있고, 아빠 역시 마찬가지라 했거니와, 작금의 법률과 혹은 불문법이 그런 자유를 말살하는 데 있다고 본다. 누구나 엄마 아빠가 될 자유를 국가가, 혹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막는단 말인가? 그것은 천부인권이다. 그런 사유리 문제제기에 보건복지부가 그.. 2020. 11. 21.
이례적으로 자세한 인삼문화 무형문화재 지정 사유 *** 아래는 문화재청이나 무형문화재위원회 공식 입장이 아니며, 내 개인 의견 혹은 해석임을 밝힌다. 나는 저 문화재위원회 현직 위원이라, 자칫 그렇게 비칠 것을 우려하지만, 보완 차원에서 몇 마디 보탠다.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 농경 분야 첫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송고시간 2020-11-20 19:04 성도현 기자 문화재청, 보유자·보유단체 없이 종목만 지정 의결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 농경 분야 첫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 연합뉴스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 농경 분야 첫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성도현기자, 산업뉴스 (송고시간 2020-11-20 19:04) www.yna.co.kr 2015년 3월 27일 제정되고 이듬해 3월 28일 시행에 들어간 무형문화재보전및진흥에관한법률(약칭: 무형문화재법)은 문화.. 2020. 11. 21.
창경궁昌慶宮, 귀찮은 왕실 골방 뇐네들의 암자 창경궁(昌慶宮) ○ 지정 명 : 사적 제 123호 ○ 저 정 일 : 1963.1.18 ○ 지정면적 : 218,148m 창경궁의 처음 이름은 수강궁(壽康宮) 이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생존한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지었다. 그 후 성종15년(1484)에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를 모시기 위하여 명정전, 문정전 등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宗廟)와 통한다.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도성 내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렸다. .. 2020. 11. 20.
세숫대야 깬 여종은 열라 팼다 여종이 낡은 세숫대야를 깨뜨렸기에 [女奚破盥面老瓦盆〕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대야 깼다고 어린 여종 혼내지 마라 객지에서 괜히 사서 고생만 시켰으니 산가의 별난 일을 하늘이 가르쳐 주려나 봐 지금부턴 앞 시내 나가 얼굴을 씻으라고 莫爲破匜嗔小鬟 客居買取任他艱 山家奇事天敎我 從此前溪抔洗顔 (《고산유고孤山遺稿)》 제1권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11) 이 시는 정사년(1617), 고산이 함경도 종성 땅에서 유배생활하던 시절에 지었다. 시로 볼 적에 어린 여종이 서울에서부터 고산을 수행해 생활 전반을 수발했음을 엿본다. 그런 신세를 알기에 대야 깼다 해서 여종을 혼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 여종이 해야 하는 일과 중 하나가 물을 받은 세숫대야 대령이 있었으니, 그 대야는 .. 2020. 11. 20.
광개토왕비는 장수왕의 친정親政 기념비 2011년 11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자, 그 후' 특별전 개최와 맞물려, 그날 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나는 '광개토왕비,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라는 발표를 했다. 이 발표문은 이후 한국고대사탐구학회 기관지에 정식 논문으로 공간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에서 나는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이른바 광개토왕비에서 능陵과 묘墓라는 글자가 엄격히 구별돼 사용되니, 전자가 광개토왕릉임에 견주어 후자는 이를 포함한 고구려 선대 왕릉 전반을 포함하는 왕가 전체의 묘역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비는 광개토왕릉이라는 단일 왕릉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고구려 전체 왕릉 묘역 수호를 위한 법령 포고비다. 둘째, 나아가 이들 왕가 묘역 전체 관리를 위해 광개토왕의 존시교언存時..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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