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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성(胡三省. 1230~1302)과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 호삼성(胡三省)은 원래 이름이 만손(滿孫)이며 字가 신지(身之), 號는 매간(梅澗)이다. 5형제 중 3남이다. 영해(寧海) 중호촌(中胡村) 사람이다. 《論語》에 나오는 “吾日三省吾身”이라는 구절에서 삼성(三省)이라고 개명했다. 다른 字로는 경삼(景參)도 썼다. 보우(寶祐) 4년(1256)에는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사방득(謝枋得)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었으며 吉州泰和尉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 해서 부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경원부자계위(慶元府慈溪尉)에 임명되었으나 재임기간 중 경원지부(慶元知府) 여문옹(厲文翁)에게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문학행의(文學行誼)로 추천되었다. 사마광이 주편한 《자치통감(資治通鑑)》 연구에 몰두하고 《통감(通鑒)》을 교감했으며 제자들을.. 2018. 3. 9.
마숙(馬驌)과 《역사(繹史)》 《역사(繹史)》는 전체 160卷이며 世系圖 1卷과 年表 1卷이 별도로 첨부됐다. 찬저자(撰著者)는 청대(淸代) 마숙(馬驌. 1621~1673)이다. 강희(康熙) 연간에 판각된 판본은 전체 40册이며 版框 高廣은 匡高 19.7公分이고 寬은 14.3公分이다. 行格은 14行24字이며 小字雙行 36字이다. 판식(版式)은 백구(白口), 무어미(無魚尾), 좌우쌍변(左右雙邊)이다. 장정(裝訂)은 선장(線裝)이며, 수장인기(收藏印記)는 학여당발태(學餘堂發兌)이며, 서발제교자(序跋題校者)로는 이청(李淸) 서(序)가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사부(史部) 중에서도 편년류( 編年類)로 배당했다. 부주(附註)로는 내봉제(內封題)로 “마씨역사”(馬氏繹史)라 했으며, 原鈐 “學餘堂發兌” 硃文印記가 있다. 卷端署에는 “추평마.. 2018. 3. 9.
사마정司馬貞과 《사기색은史記索隱》 사마정司馬貞은 사마천司馬遷 불후의 저작인 《사기史記》에 대한 해설 혹은 주석으로 시도한 완성물인 《사기색은史記索隱》 저자이나 이상하게도 행적은 불비하기 짝이 없다. 생년은 물론이요 몰년도 모조리 미상이다. 관적貫籍은 회주懷州 하내河內이며,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713~741) 초기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으며, 이후 윤주별가潤州別駕와 굉문관학사宏文館學士를 지낸 이력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史記索隱》 외에 《補史記보사기》가 있다고 하며, 《전당문全唐文》 卷402에 그의 산문이 수록된 정도다. 이런 가운데 그의 행적은 《신당서新唐書》 卷132 유자현전劉子玄傳에 찔끔 보이며, 그 외 북송시대 도서목록집인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卷4에도 역시 간략한 기술이 나온다. 그 불후의 성과로 꼽히는 사기색.. 2018. 3. 9.
곽무천(郭茂倩)과 《악부시집(樂府詩集)》 곽무천은 생졸년 미상이며 宋代 운주(鄆州) 수성(須城. 지금의 東平縣) 사람이다. 북송 남송 중에서도 南宋시대를 살다 갔다. 그의 이름은 그가 편집한 방대한 《악부시집》(樂府詩集) 100권을 통해 빛을 발한다. 郭茂倩의 생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이르기를 “《建炎以來系年要錄》載茂倩爲侍讀學士郭裒之孫, 源中之子, 其仕履未詳.”라고 했을 뿐이다. 《樂府詩集》에서는 그를 太原 郭茂倩이라고 했다. 어릴 적에 이미 詩 훈도를 받았으며, 음률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전록(篆錄)을 잘 했다. 《樂府詩集》 100권은 위로는 요순(堯舜) 시대 가요를 시작으로 아래로는 唐代의 신악부시(新樂府詩)에 이르는 각종 시가 5천389수를 모았다. 이에 수록된 가사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 2018. 3. 9.
中國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 동기교장(銅器窖藏. Kazuo tongqi jiaocang) 중국에서는 무엇인가를 한꺼번에 한 장소에 매납한 곳을 교장(窖藏)이라 부르거니와, 청동기를 묻은 곳을 동기교장銅器窖藏이라 한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喀左縣 지역에서 出土한 靑銅器를 西周시대 初年에 그 封國 중 하나인 燕國에서 山川祭祀를 지낼 때 埋藏한 청동예기(青銅禮器)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유적은 遼寧省 喀左縣 西南쪽 대릉하(大淩河) 兩岸 구릉지대 정상에서 발견됐다. 1941년 이후 모두 6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출토한 銅器는 연대가 西周 초기, 혹은 商末~周初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1941年 고로구촌(咕嚕溝村)에서 출토한 周初 동정銅鼎 1점은 높이 50여㎝이며 重量은 70여 ㎏으로 銘文이 있다. 1955年, 마창구馬廠溝 출토 周初 銅器 16건 중에는 鼎․․․ 盂․․卣․壺․盤과 압형준(鴨形尊) 등이.. 2018. 3. 9.
두헌(竇憲. ?~92)과 당고지금(黨錮之禁) 두헌(竇憲)은 字가 백도(伯度)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이다. 두융(竇融)의 증손으로 후한시대에는 외척으로서 要職을 역임했다. 후한 建初 2年(77), 황제 장제(章帝)가 두헌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세우자 외척으로서 동생인 두독(竇篤)과 더불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을 사서에서는 “賞賜累積, 寵貴日盛, 自王․主及陰․馬諸家, 莫不畏憚”이라 적었다. 황제가 내린 상이 쌓이고 총애가 날로 깊어지니 왕 이후 권세가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永元) 元年(89), 竇憲은 刺客을 보내 太后 총신인 유창(劉暢)을 살해하고는 그 죄를 채륜(蔡倫)에게 덮어 씌우려 하다가 나중에 일이 발간되어 宮廷에 감금됐다. 후한서 두융전(竇融傳.. 2018.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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