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17944

김흠운(金欽運) 김흠운(金歆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김운(金運)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는 金欽運 혹은 金歆運에서 중간 글자가 탈락된 데서 빚어진 결락으로 판단된다. 두 표기가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나밀왕 8세손으로 아버지는 잡찬 달복이다. 어려서 화랑 문노의 유파에서 심신을 수련하면서 특히 목숨을 불사하는 군인의 길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영휘(永徽) 6년(무열왕 2년, 655),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를 기려 태종대왕은 일길찬을 추증했다. 죽으면서 남긴 말이 "신라 귀골(貴骨)로 대왕의 반자(半子)"라 했으니, 태종대왕 사위임을 알 수 있지만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28년 뒤인 신문왕 3년(683.. 2018. 3. 7.
문노(文努) 화랑세기 문노 전 :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外祖)라고 말했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면서 이뇌(異腦)는 북국왕(北國王)으로 삼고는 양화공주(兩花公主)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은 남국왕(南國王)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했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2018. 3. 7.
김흠운(金歆運) 생존연대와 이름 표기, 그리고 관위 등을 고려할 때 김흠운(金欽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 2018. 3. 7.
김달복(達福)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2018. 3. 7.
달복(達福) ☞김달복(金達福) 2018. 3. 7.
신목(神睦)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記. 706년. 신라 성덕왕 5년, 당 중종 신룡 2년) :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功)을 이루고는 천수(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王)이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英靈)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孝照大王)도 승하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 2018. 3. 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