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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優永) 무령왕 원년,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한 백제 달솔이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무령왕 : 원년(501) 겨울 11월에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했다. 2018. 3. 5.
무녕왕(武寧王) '武寧王'을 '무녕왕'으로 읽어도 하등 상관이 없으나, 관례로 '무령왕'으로 읽으니 이를 따른다. ☞무령왕(武寧王) 2018. 3. 5.
김유신론(4) 전쟁은 영웅을 부르는 법 김유신이 신라의 미래 동량으로 두각을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시종 전운이 감도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단 한 해도 전쟁이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서 그 흔적을 추려보면, 38년(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쳤는가 하면, 40년(618)에는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해론(奚論)이 전사했다. 45년(623)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더니 이듬해 46년(624)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속함(速含)ㆍ앵잠(櫻岑)ㆍ기잠(歧暫)ㆍ봉잠(烽岑)ㆍ기현(旗縣)ㆍ혈책(穴柵) 여섯 성을 포위한 결과 세 성이 함락되고 급찬 눌최(訥催)가 전사하는 대패를 기록했다. 시종 백제 공세.. 2018. 3. 4.
김유신론(3) 불루칩에 투자하는 미실 정치는 바터 (진평왕 엄마인) 만호태후 뜻을 알고는 미리 물러난 미실. 그리하여 자기 아들 보종을 내리고, 그 자리에 만호태후가 점 찍은 15살 꼬맹이 유신을 풍월주에 앉힌 미실한테 만호 역시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했다. 역시 정치는 주고받기라, 노회한 정치가 만호는 또 다른 노회한 정치가 미실을 보답할 방법을 생각한다. 미실로서도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호가 내민 선물이 블루칩이고 가상화폐였기 때문이다. 11세 풍월주가 하종夏宗이다. 갑신년(564)에 태어났으니, 아버지가 세종世宗이요, 어머니가 바로 미실美室이다. 《화랑세기》 하종공 전에 의하면 15살에 화랑에 들어간 그는 역사를 사다함 형인 토함한테서 배우고, 노래는 이화공에게 배웠으며, 검술은 문노에게 터득했으며, 춤은 미실 동생인 미.. 2018. 3. 4.
김유신론(2)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절대 비호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가의 정통 후손임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그의 증조부가 바로 금관가야를 통째로 들어 신라로 귀부한 구형왕이라, 그의 세 아들 중 김무력이 아비와 더불어 투항하매, 진흥은 사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적통 공주 아양을 배필로 주니, 이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김서현이다. 따라서 부계로 보면 김유신은 금관가야만이 아니라, 진흥왕의 증손이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혈통은 이것으로 끝인가? 이것만이 그의 벼락출세를 보장하는가? 이에서 우리가 쳐다보아야 할 곳이 바로 그의 모계 혈통이니, 그의 어머니는 만명(萬明)이었으니, 실은 그의 출세를 보장한 것은 바로 이 모계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만명을 일러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라 했거니와, 이리 되.. 2018. 3. 4.
김유신론(1) 15세 벼락스타 항용 김유신 가문을 논할 때, 단재 신채호 이래 협작설 혹은 공작설이 대세이거니와,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음험취한한 김유신은 본디 금관가야 혈통인 까닭에 엄격한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는, 그것을 혼인을 통해 돌파하려 했으니, 그런 일환으로 교묘한 공작으로 자기 누이동생과 떠오르는 신라 본래의 청춘스타 김춘추를 결혼시킴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작설이 지닌 결정적인 하자가 한둘이 아님은 내가 여러 번 지적했고, 근자에 이런 내 주장과 흐름을 같이하는 글도 나오기 시작했으니, 그런 기존 논의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거나, 혹은 아예 누락한 중대한 사건 하나를 논하려 한다. 신라에 화랑이라는 독특한 군사 혹은 종교 결사체가 있었고, 이.. 2018.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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