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022 박가분과 두산 (1923년) 1923년에는 박가분이라는 화장품 광고가 나온다. 이 박가분을 제조판매한 이는 박승직이라는 사람인데 두산그룹의 창업주, 바로 그 사람이다. 1920년대 초반만 해도 신문 광고는 태반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미국, 유럽 수입품 아니면 일본 공산품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 제조된 상품 광고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박가분은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의 효시라 할 만 한데 불행히도 이 안에는 납이 들어 있어 나중에 큰 물의를 빚었다. 두산 그룹은 이 박가분으로 시작하여 기업을 일구었다. 2025. 9. 14. 불교, 해동 요순海東堯舜 세종의 유일한 흠결 세종 32년 경오(1450) 2월 17일(임진일)에 이도李裪가 숨을 거두니 이가 훗날 성군이라 추앙받는 조선 4대 왕 세종이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데는 궁궐이 아니라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1434~1467) 집 별서였다. 그의 죽음을 전하는 세종실록 해당 날짜 기사다. 임금이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였다.이 소식을 전하면서 사관은 왜 궁궐이 아닌 영응대군 집이었는지를 알릴 만한 이유가 있다 생각했음인지 다음과 같은 협주狹注를 적었다.처음에 영응 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적자로서는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봉작 명칭 변화가 많다. 태어나자 영흥대군永興大君이라 했다가 1447년, 세종 29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이라 고쳤다.. 2025. 9. 14. 영국 구빈원은 노예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헐값에 노동력 운용, 설립자 대부분은 열렬한 노예제론자 영국 구빈원들workhouses은 노예 제도에서 얻은 부에 기반하여 설립되고 유지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by 카디프 대학교 카디프 대학교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영국 구빈원은 근대 초기부터 노예 제도 및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Antipode 저널에 게재된 이 논문은 산업 자본주의 성장기에 영국 구빈원을 빈곤과 노동을 관리하는 국내적 메커니즘으로만 이해하는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연구는 오히려 영국 구빈원이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대서양 세계를 특징짓는 노예 제도, 식민주의, 인종 착취라는 세계적 시스템에 깊이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방대한 기록 자료를 활용하여 영국과 식민지 간 사람, 돈, 그리고 .. 2025. 9. 14. 고보와 중학교: 그 해묵은 증오 일제시대에 중학교라고 해서 전부 일본인은 아니고 조선인들도 다니는 경우가 있긴 했는데 대체로 조선인들은 고보, 일본인들은 중학교에 모였다. 따라서 일제시대에 무슨 무슨 중학, 하면 1937년 이전에는 이 학교는 일본인 학교로 생각하면 된다. 조선인들이 모이는 고보는 벌써 20년대가 되면 출세의 통로로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하여 고보 뿐 아니라 보통학교도 입학시험이 격화하는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인의 고보는 앞에서 조선일보 사설에서 보았듯이 똑똑한 사람들만 들어갈수 있는 학교라 일본인들이 모이는 중학교보다 고보의 인적 풀이 더 우수했다는 증언들이 꽤 있고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일본인들 같은 경우에 식민지 조선의 중학교에 진학하는 이들이 뭐 본토에 있는 일본인들에 비해 별로 그렇게 우수했을 것 .. 2025. 9. 14. 350년 된 볼리비아 '잉카' 미라 두상, 알고보니 현지 원주민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미라 두상은 오랫동안 잉카인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다른 역사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100여 년 전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이 특이한 미라 두상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원래 잉카인의 유해로 간주된 이 미라 두상은 실제로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의 것으로, 의식 일환으로 두개골에 상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이번 분석이 해당 인물을 고고학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그들의 지역 역사를 되살리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이 유해는 단순히 인류학 소장품에 있는 뼈가 아닙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주립 고고학 및 역사 박물관 박물관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클레어 브리종Claire Brizon은 이렇게 말했다. "이 유해.. 2025. 9. 14. "누군가는 그럽디다, 만리장성이라고" 북악산의 유홍준 유홍준 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이니 노무현 정부 때 일화다. (지금 찾아보니 2006년 일이라 나온다.) 당시 청와대 주변을 시민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풍조가 만연한 때라, 이 흐름을 본격화한 이는 실은 김영삼이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YS가 대통령 취임 직후 취한 일련하는 개방 움직임은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 뜯어보면 혁명을 방불했으니 청와대 앞길을 개방한 이는 그였다. 그런 흐름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계속됐으니 그가 취한 저 흐름 연장성에 위치하는 조치가 북악 일대 개방이었다. 그를 뒤이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추가 개방 움직임이 있었으니 암튼 노무현 정부 시절 그 화룡점정은 북악 일대 한양도성 일대 구간 개방이었다. 이 개방을 유홍준은 그 자신이 주도한 업적처럼 선전했으나 실.. 2025. 9. 14. 이전 1 ··· 3 4 5 6 7 8 9 ··· 350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