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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역신을 베자 황사가 그쳤다”

by taeshik.kim 2018.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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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자욱한 서울>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지만, 역사를 통괄하면 이런 일이 비일하고 비재했다.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런 점에서 과연 요즘 미세먼지 원인이라 지목하는 것들이 타당성을 지녔는지 아닌지는 심각한 성찰을 요한다. 주로 산업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듯하니, 이런 진단에 따라 차량 매연이 주범이라 해서 자동차 부제를 실시하기도 한다. 글쎄, 그럴까? 자동차가 없던 그 시절 토우(土雨), 다시 말해 흙비가 내리는 현상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각중에 궁금하다. 


2002.03.22 16:36:43 


<“역신을 베자 황사가 그쳤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초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제131권에는 조일신(趙日新)이라는 인물의 전기가 실려 있다. ‘반역’이란 딱지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니다.


본관이 평양이고 처음 이름이 흥문(興問)인 조일신은 찬성사를 지낸 조위(趙瑋)의 아들. 공민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갈 때 시종(侍從)했으며 공민왕이 환국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1등공신에 책록됐다.


그는 이런 위세를 발판으로 왕을 설득해 정방(政房)을 복구하고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 김덕린(金德麟) 등을 제거했다. 이 공으로 삼사판사(三司判事)가 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됐으며 원에 빌붙어 정권을 농단하던 기철(奇轍).기원(奇轅) 일파를 습격해 이 중 기원을 살해했다. 


조일신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을 협박해 자기는 우정승(右政丞)이 되고 정천기(鄭天起)를 비롯한 일당을 요직에 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수를 동지들에게 겨누어 함께 거사했던 장승량(張升亮) 등을 참수한 다음 정천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투옥시키고, 스스로 좌정승 겸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공민왕의 밀지를 받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과 김첨수(金添壽)에게 참살당하고 만다.


이 대목을 「고려사」 조일신 열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때 여러 날 흐리고 흙비(雨土)가 오더니 조일신을 베어버리자 날씨가 갰다.”


여기서 ‘흙비’란 실제 비가 아니라, 요즘 말하는 황사(黃沙)를 가리킨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중국 고비사막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반역자 조일신이 날뛰는데 대한 하늘의 재앙으로 생각됐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 전체를 검색하면 이와 같은 흙비 기록이 더러 나온다. 권제55는 오행(五行)의 토(土)에 해당하는 흙비와 관련된 사건만을 모아놓은 것인데, 이에 따르면 현종 9년(1018) 2월과 4월 이래 고려 멸망 때까지 모두 30여 차례에 달하는 황사 출현이 언급돼 있다. 


황사는 예나 지금이나 연례행사였을 것인데, 황사현상 중에서도 조일신 처단과 같은 정치성이 농후한 경우에 한해 기록이 남았음을 알 수 있다.


분량이 「고려사」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삼국사기」에도 신라 아달라왕 21년(174) 봄 2월 이후 모두 6차례 황사 출현이 보고되고 있다.


백제 무왕 재위 7년(606)조를 보면 “봄 3월에 서울(王都)에 흙이 비처럼 내려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 49년(627) 봄 3월에는 황사현상이 아주 심각했던 듯 “큰 바람이 불고 흙이 비처럼 닷새 넘게 내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기록이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비할 바 없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경우는 황사 출현 관련 기록만 전부 모아도 「삼국사기」 분량을 초과할 것이다.


황사와 같은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마다 왕은 하늘의 재앙이라 생각해서 죄수를 사면하는 일 따위를 했다. 왜일까? 왕은 천명(天命)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황사와 같은 기상이변을 천명의 변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럴 때마다 왕이 시행한 죄수 사면과 같은 행위를 “하늘을 두려워한 우리 선조들의 경외심” 따위로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데, 이제는 달리 보아야 한다. 스스로 왕위를 지키기 위한 제스처이자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앞 기사가 작성된 2002년 때만 해도 미세먼지라는 표현이 거의 없었고 황사라 했다. 그 명칭이 황사건 미세먼지건 요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것이 무슨 현대의 산업화 병폐처럼 언급되는 일을 자주 보거니와, 


그 일환으로 중국 책임론이 부상하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아니면 미국에 대한 반감에서 친중국 성향을 보이려 하는 작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영향은 없다느니 하는 낭설일 횡행한다. 


하지만 역사를 통괄하면, 


첫째, 미세먼지는 단군조선 이래 한반도는 언제나 겪는 일이며,  

둘째, 그것이 중국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저주받은 한반도 운명과 뗄 수 없고,  

셋째, 따라서 미세먼지는 대륙, 나아가 지구환경대기와 연동하는 질긴 문제


임을 확인한다.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자들이 헛소리를 남발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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