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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2)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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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 조를 보면 이해 여름 4월에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모두 나마奈麻로서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했다”고 하고,
 
2년 뒤인 같은 왕 8년(668) 6월 12일에는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당항진唐項津 도착할 때 숙위하던 사찬 김삼광이 수행했다고 한다.

유인궤의 신라행은 당이 기획한 고구려 정벌에 신라의 동참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당에 들어갈 때는 11등 나마였다가 거기에서 8등인 사찬으로 진급했으니, 초고속 승진이었다. 

숙위란 글자 그대로는 황제를 호위한다는 뜻으로 그런 직책을 맡은 자로써, 제후국에서 파견한다.

말이 숙위지 요즘의 외교관이라 보아 대과가 없다.

황제를 숙위하는 일을 10대 꼬맹이에게 맡기를 수는 없다.

나아가 20대가 그런 일을 하기도 힘들다.

더구나 숙위한지 2년 만에 당나라 황제의 칙사를 신라로 안내하는 일을 새파란 20대가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모르긴 해도 당에 숙위할 무렵 김삼광 나이는 적어도 30대는 되었을 것이다. 

이런 김삼광이 같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문왕 3년(683) 봄에는 파진찬으로 승진해 있음을 본다. 재상이었다.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열기 전을 보면 삼광이 집정관으로써 지방의 태수를 임명하는 모습을 노출한다.

이때가 언제인지 모르나, 아마 신문왕 초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런 활동 연대를 고려하면 아무리 늦어도 김삼광은 63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출생해야 한다.

이리 되면 그 생모라는 지소보다 나이가 많은 희한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삼광이 지소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의 지적이 오류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삼광은 655년에 김유신에게 하가한 지소의 소생일 수는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김유신이 환갑인 655년 지소를 아내로 맞기 전에 전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기야 김유신 정도 되는 인물이 환갑까지 장가도 가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2016년 6월 5일 )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1) 노익장 김유신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1) 노익장 김유신

김유신은 정실에게서 5남 4녀를 두었다.딸들은 역사에서 모두 이름이 지워졌지만, 다섯 아들은 모두 현달했으니, 그 이름들을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3 김유신 전에서는 이찬 삼광(三光)·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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