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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3) 그 짙은 그림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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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옮기기가 귀찮아 캡쳐한 해당 부분을 아래 사진으로 첨부한다. 

출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 삼국사기》 주석본 중 김유신 열전 하에 보이는 김삼광金三光에 대한 해설이다. 

해제 부분을 봐야겠지만 아마도 이 대목은 권덕영 선생 담당일 것이다. 스타일이 보니깐 그러하다.

삼광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 과분하게도 내 논문을 인용했다. 

한데 이를 보면 앞서 내가 분석한 것과 거의 같은 이유로 권덕영 역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삼광은 지소의 소생일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아마도 그는 전처의 소생이라고 판단된다"고 했다. 

나는 저런 해설과 분석에서 주석을 단 이가 화랑세기를 아주 심각히 의식한 그림자를 본다.

그는 분명히 화랑세기에 김유신이 지소 이전에 원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처음 영모令毛라는 여인과 혼인을 했다.

이 영모라는 여인은 나중에 따로 설명하기로 하고 어떻든 영모라는 이가 김유신의 첫 부인으로 등장한다.

지소는 보이지 않는다.



둘이 결혼한 때는 명확한 시점을 밝히지 않았지만 전후맥락으로 보면 김유신이 대략 20살 안팎이었을 무렵이다.

현행 화랑세기엔 둘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지가 언급이 없다.

내가 지금 화랑세기 텍스트가 없어 밖에서 이 글을 작성하는 까닭에 나중에 착오를 바롭잡기로 한다.

한데 유신은 영모에게서 네 딸을 둔다. 진광晉光 신광信光 작광酌光 선광善光이라는 실명이 화랑세기엔 보인다.

이 대목이 실은 놀랍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엔 그가 딸 넷을 두었다고 하면서 그들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 실명을 화랑세기가 폭로한다.

삼광은 영모가 낳은 아들이다. 이는 화랑세기와 관련한 남당 박창화의 필사본 족보 그림인 《상장돈장》을 보면 명확하다. 

이에는 김유신이 첫 부인 영모에게서 네 딸과 삼광을 두었고 둘째부인 지소에게서 원술 이하 네 아들을 둔 것으로 나온다.

역주 삼국사기 필자는 분명히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필자가 권덕영이라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화랑세기 위서론자를 대표하는 이가 노태돈과 함께 권덕영이다.

그는 누구보다 화랑세기를 세밀히 검토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화랑세기가 가짜라는 논문을 공간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김삼광에 대해 저런 설명을 달았다. 왜 저런 식으로 표현해야만 했는가?

자칫하면 삼광이 전처 소생이라는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다름 아닌 가짜론자인 자신이 보증하는 참사를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식으로 화랑세기는 출현 이후 계속 역사학계를 압박하는 중이다. 그 다수가 그것을 위서라고 사망선고를 내렸지만 언제나 화랑세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 것이다.

이것이 실은 곳곳에서 이미 파찰음을 내고 있다.

화랑세기는 가짜라 해서 쳐다보지도 않거나 가짜라고 주장한 이들이 무심코 고심해서 밝혀낸 사실이라고 해서 자신 있게 발표한 글이 공교롭게도 화랑세기에 보이는 내용과 합치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그 참사의 대표적 주인공이 건국대 김기흥과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다. 이들이 어째서 그랬는지,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주장이 실은 화랑세기에 나온다.

그러니 너희는 화랑세기를 표절했다는 지적을 받자마자 그들이 보인 반응은 뒤에서 살피기로 한다. (2016. 6. 5)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2)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화랑세기를 향한 심리의 저항선과 이끌림] (2)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 조를 보면 이해 여름 4월에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모두 나마(奈麻)로서 당에 들어가 숙위(宿衛)했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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