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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새롭게 드러난 누벨프랑스 원주민 아동 노예 참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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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명 육박, 혹독환 환경에 대부분 10대에 사망

 



1632년에서 1760년 사이의 역사적 기록은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734명 원주민 아동이 프랑스령 북미 식민지에서 노예로 팔렸다.

가족과 떨어져 먼 곳으로 끌려간 이 아동들은 사고팔고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체제에 종속되었다.

퀘벡 여성 역사학자 도미니크 델랑드르Dominique Deslandres는 최근 두 건의 연구를 통해 캐나다 역사에서 거의 잊힌 이 부분을 조명한다. 

원주민들 사이의 노예 제도는 유럽인들과 접촉하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프랑스, 그리고 이후 영국은 로마법Roman law에 기반한 더욱 엄격하고 영구적인 형태를 도입했다.
 

1909-1910년 졸업반 – 캐나다 유일의 학교(1861년, 도망 노예들이 세움) 앞에서 찍은 졸업 사진. Credit: Buxton National Historic Site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자동으로 노예가 되는 제도였다. 이는 노예 제도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대물림되지 않고 종종 일시적이거나 상징적인 성격을 띤 원주민 문화와는 달랐다.

(저 법률은 이상하게도 경국대전을 필두로 하는 동아시아 법률과 맥락이 같다.) 

몬트리올 대학교 교수인 데슬랑드르는 몬트리올Montreal (당시 빌마리Ville-Marie)의 노예 제도 역사가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녀의 최근 논문들은 식민지 내 노예 제도의 규모뿐만 아니라 특히 아이들에게 미친 파괴적인 영향도 보여준다. 

역사가 마르셀 트루델Marcel Trudel은 한때 누벨프랑스New France에 약 4,000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최근 증거에 따르면 실제 노예 수는 1만 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령별로 확인된 노예 중 거의 절반이 마지막 기록 당시 12세 미만이었다.

몬트리올에서만 확인된 노예 947명 중 430명이 12세 미만 원주민 어린이였다. 
 

예술가 우드로 내쉬Woodrow Nash가 해방 노예 자녀들을 조각한 작품. 해방 노예들이 지은 안티오크 침례교회Antioch Baptist Church에 전시되어 있다. Public Domain


당시 프랑스 식민지 용어인 파니스panis 또는 파니스panisse로 잘 알려진 이 아이들은 정체성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이름만 남거나 주인 성을 물려받았는데, 이는 그들의 뿌리를 박탈하는 비인간적인 관행이었고, 델랑드르Deslandres가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이라고 언급한 상황을 초래했다.

사망률은 끔찍할 정도로 높았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노예가 된 원주민 소년 절반이 17세 이전에 사망했고, 영국 통치 하에서는 중위 연령median age이 11세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동안 소녀들 중위 사망 연령은 21세에서 13세로 낮아졌다. 이러한 패턴은 질병 이외의 다른 원인, 즉 학대, 가혹한 환경, 방치가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동 노동 수요는 식민지의 증가하는 농업 수요, 가사 노동, 그리고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노동자들을 통제하려는 욕구로 인해 촉발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는 비교적 희귀하고 값비쌌기 때문에 식민지 주민들은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적의 아이들을 약탈하기 위해 토착 동맹국에 의존했다.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경향은 식민지적 가치관과 가족 구조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아이를 노예로 키우는 것은 장기적인 복무를 보장하고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델란드르스 설명에 따르면, 어렸을 때 노예로 잡힌 아이들은 토착 가족과 문화와의 유대감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더 쉬웠다.

노예 아이들은 가족에 편입되기보다는(이전 기록에서 암시하려 한 것처럼) 엄격한 가부장적 예속 생활을 했다.

그들은 집 안팎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고, 평생 소유되었다. 특히 프랑스 통치 말기에 반란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잔혹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경매 블록에 서 있는 노예 여성과 어린이, 잠재적 구매자들로 둘러싸여 있다. 1800년~1899년, from The New York Public Library


한 소녀가 실수로 애인을 다치게 해서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노예 소유는 모든 사회 계층에 걸쳐 존재했다.

가족들은 오늘날의 렌터카처럼 노예를 단기 임대하기도 했다.

노예가 된 아이가 병에 걸리면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수도 있는데, 이는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자산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델랑드르와 그녀의 팀은 '트란스크리부스Transkribus'라는 AI 기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수천 점 고대 문서를 분석했다.

'파니스panis'와 같은 용어를 간단히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수백 개 기록이 발견되었고, 연구자들은 이를 통해 개별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François 이야기가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여섯 살 무렵 노예 소년이던 그는 17세에 해방되어 땅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빚더미에 올라 다시 옛 주인의 노예가 되었다.

프랑수아 이야기는 특히 데랑드르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녀의 조상은 어린 시절 누벨프랑스로 끌려온 원주민 노예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프랑수아가 살던 거리, 그가 일하고 살던 곳 근처 생폴 거리를 걸으며 오늘날 몬트리올 근간을 이루는 슬프고도 눈에 띄지 않는 역사를 되짚어본다.

More information: University of Montreal

Publications: Dominique Deslandres, (2025). À la recherche de François, panis de Pierre Prudhomme, Searching for François, Pierre Prudhomme’s panis, Les Cahiers des Dix. DOI: 10.7202/1117951ar

“Enfant et esclave à Montréal : un angle mort de la recherche / Montreal’s child slaves: a blind spot in research,” (2024). http://www.erudit.org/fr/revues/rhnf/ … -rhnf09391/105183ac/
 

1712년 누엘프랑스 영토

 
누벨프랑스Nouvelle-France는 영어로 New France라고도 하는 북아메리카 프랑스 식민지를 말한다.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강을 탐험하기 시작한 이래, 1763년 스페인과 영국에 할양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712년 전성기 때 누벨프랑스는 뉴펀들랜드에서 로키산맥까지 그리고 허드슨만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렀다.

이곳 영토는 5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캐나다Canada, 아카디, 허드슨만, 뉴펀들랜드 그리고 루이지애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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