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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폭발하는 미라 수요, 공급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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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룩소르에서 포착한 저 노점상이 파는 미라는 진품일까 가품일까?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은 유럽인들에게 이집트 문의 역사를 열었다.

당시 미라는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했고, 실제로 사교 모임 주요 행사로 사용하기 위해 사진에서 보듯이 노점상에서 미라를 구입할 수도 있었다.

당시 엘리트들은 종종 "미라 포장 풀기 파티Mummy Unwrapping Parties"를 열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시끄러운 청중 앞에서 미라 포장을 풀며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것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잘 보존된 고대 이집트인 유해는 일상적으로 가루로 갈아 약용으로 소비되었다.

실제로 분쇄 미라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위조 거래를 유도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산업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이집트 미라는 더 많은 공리주의적 목적으로 악용되었다.

갈색 안료를 만드는 데 사용되거나 포장이 벗겨져 제지 산업에 사용되기 위해 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은 이집트에서 미라가 기관차 연료로 불에 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산업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이집트 미라는 보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엄청난 수의 인간과 동물 미라가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 분쇄되어 영국과 독일로 운송되었다. 

다른 것들은 미라 갈색 안료mummy brown pigment를 만드는 데 사용되거나 포장을 벗겨낸 후 제지 산업에 사용하기 위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심지어 이집트에서 기관차 연료로 미라를 태웠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19세기가 진행되면서 미라는 귀중한 전시품이 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유럽과 미국의 부유한 개인 수집가들이 관광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미라 전체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머리, 손, 발 등 분해된 유해를 암시장에서 구입해 집으로 밀수입할 수 있었다.

유럽으로 거래하는 미라가 너무 활발했기 때문에 무덤과 지하실을 수색한 후에도 고대 이집트 시신이 수요를 충족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형된 범죄자, 노인, 가난한 사람, 흉측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 시신을 모래에 묻거나 역청을 채우고 햇볕에 노출시켜 가짜 미라를 제작했다.

미라 브라운Mummy brown이라는 안료는 원래 16세기와 17세기에 흰 피치, 몰약, 이집트 미라의 기초 유적인 인간과 고양이로 만들었다.

투명도가 좋았기 때문에 광택, 그림자, 살색, 음영 등에 사용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역청과 미라 상태의 살을 유화 물감에 사용해도 금이 가거나 마르지 않는다고 믿었다.

미라 브라운은 20세기 후반, 가용 미라 공급이 고갈되면서 결국 전통적인 형태의 생산을 중단했다.

머미아Mummia 또는 머미mummy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사용하는 물질이거나 "의료 제제"로 사용되는 분쇄한 미라로 만든 분말을 말한다.

고대 이집트의 미라 제작에서는 기관이 제거된 후 빈 체강을 채우는 재료로 아스팔품asphaltum(페르시아어 무미야mumiya)를 자주 사용했다. 

중세 시대에 고대 이집트 미라에 사용한 수지는 일반 아스팔트보다 약용 및 화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여겨졌고, 그에 따른 성분 수요로 인해 성분 자체만큼이나 그 수확에 필요한 시체에도 이 용어가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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