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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전대미문 적국 포로가 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 페르시아 신전에 기념물로 봉안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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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나크쉐 로스탐 Naqshe Rostam 이라는 데 남은 이 부조 기념물은 역사의 한 장면을 구상화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고 나 또한 현장을 가서 실견한 적 있거니와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로마제국의 굴욕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아로새긴다.

말을 타고선 거만하게 내려보며 일장 훈시를 하는 이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1세 Persian King Shapur I 요

그 아래 무릎을 꿇고서 복종의 뜻을 나타내며 긍휼과 자비를 구걸하는 이가 로마황제 필리푸스 Philippus the Arab 라

서기 260년, 양국 전투에서 샤푸르는 포로가 되어 저 신세로 전락했고



Naqshe Rostam. 저 외로운 이가 배기동 선생이다.



더구나 저런 기념물로 남아 지금껏 조롱받는 신세다.

저 장면 배경이 되는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 없으니 오늘은 과거에 미뤄둔 그것을 잠깐 정리하고자 한다.

이란을 흔히 페르시아 Persia 라 하거니와, 지금의 이란을 근거지로 삼은 페르시아를 말할 적에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정도로 각인하지 않나 싶은데,

첫번째는 한때 동방의 제국으로 군림하며 그리스 동맹을 위협하다가 이른바 마라톤 전쟁 Battle of Marathon 에서 그리스 동맹한테 개박살났다가 훗날 알렉산더대왕한테 먹힌 그 페르시아 제국이요,

다른 하나는 사산조 페르시아 혹은 사사니안 제국 Sasanian Empire 이라 해서 서기 224~651년 지금의 이란을 무대로 번성한 페르시아 제국이 그것이라,

그런 까닭에 이 두번째 제국을 일러 제2차 페르시아 제국 Second Persian Empire 혹은 신 페르시시아 제국 Neo-Persian Empire이라 부른다. 

이 사산조 페르시아가 내가 세계사를 공부할 적에는 한반도사와도 일정 부문 연동하는 역사로 배운 기억이 있으니 박트리아니 뭐니 해서 지금 생각하면 그땐 배울 만한 것은 다 배웠다고 기억한다.

문제는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다는 것 아니겠는가?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 부조 무대가 되는 페르시아는 말할 것도 없이 사산조朝 페르시아를 말한다.

이 사산조 페르시아는 창건주를 아르다시르 1세 Ardashir I라 하지만, 그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가 실은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다.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 두번째 황제인 샤푸르1세는 아버지 생존 기간에는 아버지와 함께 왕국을 통치했다 하며, 아버지 사후 왕조를 완전히 그의 손아귀로 통합하고는 강력한 왕조를 이룩했으니

서쪽으로 영역 확장에 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그곳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맞서게 되거니와 로마 점령하 시리아[Roman Syria]까지 진격하면서 그에 속한 도시들인 니시비스 Nisibis 와 카라이 Carrhae 같은 도시들을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패배도 있었으니, 서기 243년 레세나 전투 Battle of Resaena 에서 로마 황제 고르디안 3세 Gordian III한테 패배했지만 이듬해 미시체 전투 Battle of Misiche 에서 승리함으로써 곧바로 보복에 성공하고

새로 즉위한 로마 황제 필립 아랍 Philip the Arab 한테서는 저와 같은 대승리를 쟁취했다.

이 대목을 조금 더 상세히 보면 이렇다. 

로마를 향한 공세를 계속한 샤푸르1세는 서기 252년에는 여세를 몰아 바르발리소스 전투 Battle of Barbalissos 에서 6만 로마군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내는 한편 당시 로마 속주인 시리아를 처절히 유린한다.

결국 더는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 없던 로마제국에서는 황제 발레리아누스 Valerianus 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첫끝발 개끝발이었고 이것이 비극적인 최후로 끝나고 말았다. 

페르시아가 점령한 안티오키아를 회복할 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패착은 너무 깊이 페르시아 군대를 추격한 것이 문제였으니, 결국 이는 강감찬한테 당한 소배압과 비슷했다.

다만 소배압은 목숨이라도 건져 도망이라도 쳤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전대미문하는 사건, 곧 적군의 포로가 되어 각종 조롱을 당하다가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개로왕과 더 비슷했다. 

도망치는 페르시아군를 추격한 발레리아누스는 지금의 터키 동부 우르파 Urfa 라는 곳 에데사 Edessa 에서 페르시아군에 반격을 당하고 이 전투에서 무참히 패하고 그의 군대는 도륙되고 그 자신은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서기 260년에 일어난 일이다. 

포로가 된 로마제국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 샤힌샤 Shahanshah, 곧 왕 중의 왕 King of the Kings 샤푸르 1세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국사에서 그 황제가 적국에 포로가 된 일은 전대미문이었고, 결국 이 일로 로마제국은 급속도로 흔들려 황제를 자처하는 자가 곳곳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어찌 되었을까?

초기 기독교 작가 락탄티우스 Lactantius [대략 서기 250~325년 무렵 생존]는 증언이 있거니와, 그에 의하면 샤푸르 1세는 자기 말에 올라탄 채 발레리아누스한테 온갖 굴욕감을 주었다 한다. 바로 그가 말하는 이 대목이 저 부조와 합치한다.

로마제국 정치인이요 작가인 아우렐리우스 빅토르Aurelius Victor [대략 320~390년 무렵 생존]에 따르면 그는 우리에 갇힌 신세로 있으면서 페르시아 황제의 연희 같은 데 동원되어 치욕을 당했다고 하며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은 가죽이 벗겨진 채 그 안에는 거름과 짚으로 채워져서는 페르시아 신전에 페르시아의 위대한 승리를 선전하는 기념물로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전투는 이기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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