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포스팅에 김단장께서 자료 사진을 하나 붙여두신 바
이 자료에 대해 필자 나름의 해설을 좀 해본다.
조선시대에 준호구는 호적을 기본으로 뗀 요즘으로 치면 호적등본 같은 것인데,
대개 과거 시험 보러 갈 때들 많이 뗐다고 들었다.
이 준호구는 광서 8년에 발급된 것이니 1882년이다.
이 해에 임오군란이 있었다.
이 준호구를 발급받은 분이 과거를 보러 이것을 뗸 것이 맞다면
청운의 뜻을 품고 올라갔을 터.
이 분의 직역은 이 자료를 보면 유학이다.
양반이라는 뜻이다.
준호구에 부인의 성 아래에는 "씨"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적에 "씨"는 아무나 붙이지 않고 양반의 부인에게만 "씨"를 붙인다.
호적에서 중인의 부인은 "성", 평민의 부인에게는 "소사 (혹은 조이)"로 붙이므로 이 준호구를 보면 이 분은 양반 호적이다.
그런데-.
준호구에는 호적에 적혀 있는 본인의 친가 3대조, 그리고 외조부,
처가 3대조와 외조부를 적게 되어 있는 바-.
이 여덟분의 조상 (친가 3대조와 외조, 처가 3대조와 외조)
모두가 "학생"으로 되어 있다.
바로 ":살아서는 유학 죽어서는 학생"이라 할 때 바로 그 "학생"이니,
이 분은 친가 처가 3대조에 외가까지 벼슬을 한 분이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그러니 직역을 학생으로 적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3대가 벼슬을 하지 않은 집에 해당하지만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양반"으로 분류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서도 19세기 들어가면
이런 양반들 과거 시험 많이 쳤고
급제자도 꽤 나왔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제대로 된 양반이 거의 없다고 일컬어지던
평안도 지역 문과 급제자 수가
전통의 강호 경상도보다 더 많다.
그들 모두는 아마 이와 비슷한 준호구,
친가 처가 3대조에 외조까지 몽땅 학생이라는 준호구를 들고 과거를 보러 갔을 테고
그 중에 일부는 급제해서 출신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양반이 정의와 그 구성이 19세기 중후반 넘어서면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바
우리 집이 원래 양반 집안이라는 의식은
대개 바로 이 19세기 말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 현재 한국인들한테 물어보면
자기 집이 양반 집 아닌 집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년만 올라가면 우리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나라였다.
얼마나 한국의 변화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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