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다. 기사 입력은 2016년01월25일 12시16분이다.
근자에 《고려사절요》를 통독하며 고려사 500년을 훑다가 중·말기로 갈수록 짜증 혹은 분노가 치솟는 걸 보니 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고려가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원나라 간섭을 무려 100년간이나 받으며 왕을 필두로 하는 고려인들이 갖은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데다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주는 고통까지 덤터기로 썼으니 아마도 이때가 한국사 가장 참혹한 시대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감정은 비단 지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줄로 안다. 굴곡의 근현대 한국이 겪은 참상이 아마도 고려 시대 그때로 오버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나는 한국사가 이때만큼 세계를 향해 더 열려 있던 때가 없다고 본다. 전근대 언제나 그러했듯 중국은 그때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특히나 칭기즈칸의 유산으로 이룩한 원(元)은 그야말로 세계 제국이었다. 어쩌면 이 몽고 원 제국이 당시 세계에 미친 영향은 지금의 미국이 현대 세계에 가하는 영향보다 더 컸을 것이다. 원 제국이 주는 고통에 고려인들은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듯하지만, 그 넓은 중국 대륙을 앞마당 드나들 듯 한 시대 역시 이때였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고려와 고려 사람들은 원 제국 일원으로 강제 편입되고, 그에 따른 혹독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편입이 주는 열매 역시 그보다 더 달콤할 수는 없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고려왕이나 왕족들은 인사권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에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 대부분은 원 황실의 사위가 되어 종래에는 누리지 못한 세계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를 증언하는 《고려사절요》를 훑다 보면 충숙왕 16년(1329)에서 이상한 사건 하나를 마주한다. 이에서 이르기를 이해 봄 정월에 “심왕(瀋王)의 공주 눌륜(訥輪)의 상(喪)이 원에서 도착했다(瀋王公主訥倫之喪, 至自元)고 했다. 이 경우 ‘상(喪)’은 그 시신을 실은 운구 혹은 상여 행렬을 말한다. 왜 이 기록을 이상하다 하는가? 느닷없기 때문이다. 눌륜이 누구인지 설명도 없고, 더구나 그 앞 어디에도 눌륜이 죽었다는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원문을 보면 ‘심왕 공주 눌륜’이라 해서 언뜻 보면 ‘심왕의 공주(딸)인 눌륜’처럼 읽힌다. 어떻든 눌륜의 운구가 원나라에서 이르렀다 했거니와, 이 경우 도착한 지점은 틀림없이 당시 고려의 서울 개경을 말할 것이다. 또한 눌륜이라는 이름도 영 생소하다. 한자 그 자체로도 도무지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 사정을 고려할 때 어쩐지 몽고 냄새가 짙다. 이런 궁금증들은 뒤에서 풀어보기로 하고 우선 그 뒤에 일어난 관련 사건을 같은 《고려사절요》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타난다.
“여름 4월에 눌륜공주(訥輪公主)를 장사지냈다. 이튿날 도적이 그 묘를 도굴했다.(夏四月, 葬訥倫公主, 翼日, 盜發其墓)”
‘발(發)’이라는 동사는 기본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도굴’을 말한다. 요즘 고고학도들이 땅을 파서 과거의 흔적을 찾는 일을 ‘발굴(發掘)’이라 하는데, 발굴이라는 말 자체가 실은 ‘도굴’과 이종사촌임을 여실히 확인한다. 눌륜공주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시점이 1월이고, 최종 매장된 때는 4월이니 대략 3개월간 어딘가에 임시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죽어서 최종 매장하는 시점까지 어딘가에 시신을 두고 조문 등을 하는 행위를 ‘빈(殯)’이라 한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공간, 혹은 시설을 ‘빈전(殯殿)’이라 하거니와 요즘은 ‘빈소(殯所)’라는 말을 흔히 쓴다. 동아시아 세계의 각종 의례(儀禮), 곧 세레모니를 지배한 절대 경전인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이라는 곳을 보면 “천자는 죽고 나서 7일 지나 빈(殯)했다가 7월이면 장사지낸다. 제후는 죽은 지 5일 뒤에 빈하고 5개월 만에 장자지내며 대부(大夫)와 사(士), 그리고 일반 백성은 죽은 지 3일 만에 빈했다가 3개월 뒤에 장사지낸다”고 했다.
눌륜은 공주라고 했고, 또한 지금 심왕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 제국의 제후왕임이 확실한 이상, 《예기》에 따른다면 5개월 뒤에 시신을 묘소에 최종 안치했어야 하겠지만, 보통의 관료라든가 일반 백성에 준해서 장례를 치렀다고 추정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다. 법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눌륜이 실제로 죽은 날을 기점으로 삼을 때는 빈 기간이 5개월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눌륜의 운구가 개경에 도착하고, 3개월 뒤에 묻힌 일은 또 다른 고려 정사인 《고려사》에도 보인다. 《고려사절요》에는 운구가 개경에 도착할 날과 묻힌 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고려사》에는 그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즉, 운구가 개경에 도착한 날을 정월 기미일이라 하고, 그를 묻은 날을 4월 경인일이라고 한다.
이제 앞에서 미뤄둔 문제, 다시 말해 눌륜이 누구인지를 해명할 때가 되었다. 눌륜은 당시 심왕(瀋王)인 왕호(王暠)라는 사람의 정비다. 심왕이란 ‘심양(瀋陽)의 왕’이라는 뜻이니 원 황제가 고려왕 혹은 그 왕족에게 책봉한 제후 칭호 중 하나다. 나는 앞에서 원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게 된 일이 고려에는 고통이기는 했지만, 그 열매 역시 달콤했다고 말했다. 충선왕은 당시 원 제국 서울에 체류하면서 황위 계승에도 깊이 관여해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그 대가로 새로 즉위한 원 제국 황제 무종에게서 심양을 중심으로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를 통치하는 심양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 이은 제2대 심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1316년 이래 1345년까지 무려 30년에 이른다. 그 위세 역시 막강해서 고려왕을 시종 위협하며, 실제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심왕 왕호는 충렬왕 손자다. 충렬왕은 아들 셋을 두었다. 원 제국 쿠빌라이 칸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어 충선왕을 낳았고, 정신부주(貞信府主)라는 후궁에게서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를 두었으며, 그 외에도 반주(盤珠)라는 또 다른 후궁한테서 왕서(王湑)라는 아들을 얻었다. 맏이는 왕자였지만, 원 황실을 등에 업은 정비 소생 충선왕에게 권위가 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왕자는 살아남고자 승려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환속해서 왕호를 비롯한 아들 셋을 두었던 것이다. 다행히 왕호는 삼촌인 충선왕에게 총애를 받아 이를 발판으로 심왕 자리를 이어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왕호가 성공 가도를 달리는 데는 그 역시 원 황실의 적극적인 도움이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의 장인은 원 제국 황족 일원으로 양왕(梁王)에 책봉된 송산(松山)이라는 사람이다. 송산은 쿠빌라이(1215~1294)의 증손자이면서 할아버지는 진금태자(眞金太子, 1243~1286)다. 진금태자는 형이 일찍 죽자 일찌감치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불행은 아버지 쿠빌라이가 무려 80세로 지나치게 장수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림이 너무 애탔는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만 이후 원 제국 황제는 모두 진금태자 후손에게서 나온 일로 사후 보상을 받게 된다.
진금태자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맏이가 카마라(甘麻剌). 처음에는 양왕(梁王)에 책봉되었다가 나중에는 진왕(晉王)으로 옮겼다. 그의 딸 중에 계국공주(薊國公主) 보탑실리(寶答失里)가 충선왕에게 시집갔다. 충선왕과 보탑실리는 금슬이 아주 나빠 이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느닷없이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카마라 역시 아버지 진금태자처럼 그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의 둘째아들이 10대 황제가 되니 그가 태정제(泰定帝)다. 카마라가 지닌 진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맏아들 송산(松山)에게 넘어간다.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바로 송산의 딸이다. 계보가 매우 복잡하니 간단히 할아버지 충렬왕 이래 그 아들 충선왕, 그리고 충렬왕 손자이면서 충선왕에게는 조카인 왕호 모두 원나라 황실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한다.
고려 왕실이 원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구속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들 고려 왕족이 때로는 원 제국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엄청난 파워를 휘둘러 그 정치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충선왕 같은 이는 황위 계승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당대 정치를 주름잡았다. 오죽하면 아버지 충렬왕이 죽고 난 뒤에도 고려왕이 싫다 하면서 원나라에 계속 머물고자 했겠는가?
기록에 확실치 않은 면이 있지만, 심왕 왕호의 부인 눌륜은 내가 보기에는 원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에서 나고 자랐으며, 남편 왕호를 따라 심양에서 생활했거나 어쩌면 연경에서 죽 생활한 듯하다. 고려 혹은 개경하고는 인연이 남편이 그쪽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한데도 막상 눌륜은 원나라 땅에서 죽어서는 그곳에서 잠들지 못하고 개경으로 왔다. 그 이유는 ‘출가외인’이라는 그 시대 관습에서 말미암는다. 남편이 죽을 땅에 묻혀야 했던 것이다. 한데 생전에는 각종 호사를 누렸겠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사후 생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가 묻히고 무덤 문이 닫힌 그 다음날 그 무덤으로 밤 손님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앞서 본 기술이 전부다. 도굴 피해는 어떠한지, 관련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연 말이 없다. 이 사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까닭에 추가 언급을 뺏을 수도 있다. 이는 영원히 미궁으로 묻혀 버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도굴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무덤에는 어떤 물건들이 묻혔을까? 범인이 안 잡힌 미제 사건인지 모르나, 나는 누가 범인인 줄은 대강은 안다. 누구인가? 무덤을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굴은 단독 범행이 없다. 도굴은 한밤중에 하므로, 촛불을 비춰주거나 하는 공범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범인 중 적어도 한 명은 틀림없이 그 전날 눌륜공주를 안장하는 의식에 참여한 사람이다. 무덤 구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른바 면식범 소행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무덤이 어떠했기에 이렇게 간단히 도굴되었을까? 눌륜공주의 무덤 소재지와 그 실물이 밝혀졌는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무덤은 안 봐도 돌방무덤이다. 이 시대에는 왕릉을 비롯해 거의 모든 무덤이 합장분이라 해서 대체로 부부를 같은 무덤방에다가 묻었다. 부부가 몰사하거나 동시에 자살하지 않는 한 죽는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때도 평균 연령은 여자가 높아 남편이 먼저 죽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눌륜은 남편보다 먼저 죽었다. 나중에 남편 왕호는 죽어서 눌륜이 기다리는 무덤으로 틀림없이 먼저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부부 합장묘는 대체로 돌방무덤으로 만든다. 그 돌방무덤은 한 쪽에다, 거의 예외 없이 남쪽에다가 무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마련한다. 이 무덤 문을 통해 나중에 죽어서 들어오는 남편이나 부인 시신을 들이게 된다. 그러니 돌방무덤은 도굴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비록 무덤 문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자물쇠를 채운다 하지만, 구조를 아는 사람들한테 이 문을 따기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그렇다면 왜 도굴했을까?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더구나 원나라 황실의 공주다. 도굴 우려 때문에 이 시대 한편에서는 박장(薄葬)이라고 해서 껴묻거리를 일부러 적게 묻는 일도 있지만, 대체로 후장(厚葬)이라 해서 잔뜩 묻는 일이 흔했다. 더구나 껴묻거리가 아무리 적다해도 원 황실의 공주 무덤 아닌가? 서민들한테는 엄두를 낼 수 없는 보물로 찾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굴꾼은 이를 노린 것이다.
이 무렵 고려 시대 왕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물이 있다. 고려 시대 왕릉은 대부분 개경에 소재하는 까닭에 그 실체적 접근이 우리로서는 지극히 어렵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강화도에는 그 왕릉 몇 기가 다행히 남아있고, 그 대부분은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들 왕릉은 강도(江都)시대, 그러니깐 강화도에 도읍한 시기에 만든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고려왕조는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옮겨 몽고 침입에 30년 이상을 버텼다. 개중 하나로 석릉(碩陵)이라는 곳이 있다. 제21대 희종(재위 1204∼1211) 무덤이다. 이곳은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조사 결과 묘역(墓域)을 어떻게 꾸몄으며 시신을 묻은 공간인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봉분 주위로는 ‘∩’ 자 모양 담장(曲墻)이 둘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목할 만 한 점은 무덤방 천장을 길이 300㎝, 너비 120㎝ 안팎인 대형 판석 3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평면 8각형 호석(護石)을 둘렀다는 대목이다. 담장과 호석 사이에는 납작한 작은 돌을 깔았다. 이는 아마도 왕릉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구조로 판단된다. 돌로 만든 무덤방은 길이 310㎝, 너비 210㎝, 높이 220㎝ 규모이며 양측 벽과 뒷벽에는 깬돌을 이용해 7단으로 쌓았다.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은 양측 벽 전면에 장대석 각각 1개씩을 놓아 기둥처럼 사용했고 대형 판석 1개로 막음 처리를 했다. 시신을 안치한 관을 놓은 바닥인 시상부(屍床部)는 풍화암반층 위에 두께 20㎝ 안팎의 장대석을 이용했다. 이미 여러 차례 도굴 피해를 본 까닭에 출토 유물은 많지 않으나 온전한 모양의 청자탁잔(靑磁托盞) 3점을 비롯해 꽤 많은 청자 제품을 수습했다. 나무 널에 사용한 철못과 널 부착물로 판단되는 금박(金箔) 조각, 구슬류 몇 점도 확인됐다. 이로 보아 원래 이 무덤에는 부장품이 상당했을 것으로 판단됐다.
이 석릉은 남한에서는 최초로 실시된 고려 왕릉이다. 이후에도 인근 고려 시대 왕릉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덤이 추가로 더 조사됐다. 2004년 조사한 고려 제22대 강종(康宗)의 비 원덕태후(元德太后) 무덤인 곤릉(坤陵)과 제24대 원종(元宗)비 순경태후(順敬太后) 무덤인 가릉(嘉陵), 그리고 2007년 조사한 능내리 고분이 그들이다. 이들은 기본 무덤 구조가 같다. 눌륜공주의 무덤 역시 시대가 비슷하므로 틀림없이 석릉과 비슷했을 것이다. 껴묻거리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도굴꾼들이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도굴은 앞서 보았듯이 그것을 의미하는 행위를 ‘발(發)’이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는 파낸다는 뜻이다. 도굴이나 발굴은 결국 무엇인가를 땅에서 파내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정식 고고학 발굴 역시 ‘보물’을 캐내고자 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다. 다만 도굴과 발굴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를 통해 노리는 보물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그 시대 문화사를 ‘발굴’하고자 한다. 이것이 고고학이 노리는 보물이다. 물론 고고학이라 해서 값비싼 금붙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요새야 고고학 역시 홍보와 뗄 수가 없어 금붙이가 많이 나오는 발굴을 일러 ‘대박쳤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시대 문화상 복원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금붙이를 비롯한 유물의 습득과 그 판매를 통한 실질적 금전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도굴과는 길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발굴을 근간으로 하는 고고학 역시 도굴에 분명히 뿌리가 있다. 도굴 없이 오늘날의 고고학 발굴이 존재할 수는 없다고 나는 본다. 그 시대를 증언하는 유적과 유물이 땅속에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도굴이 길을 열어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고리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도굴은 과연 언제쯤부터 있었을까? 또 무엇 때문에 도굴은 성행했을까? 도굴이 성행함에 따라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나아가 그런 대응들은 얼마나 성공했는가? 혹여 그런 대응에 대해 우리의 도굴꾼들은 또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런 점들을 함께 고려하면 도굴은 단순히 보물 캐기가 아니다. 도굴 역시 문화현상 중 하나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이 범죄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런 점을 들어 단순히 성토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사를 탐구해 보아야 한다. 이를 훑다 보면 도굴에도 피눈물이 있다. 도굴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소위 민초들의 고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주로 무덤을 대상으로 하는 도굴은 한편으로는 분노이며 눈물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여러 도굴 양상을 점검하기로 한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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