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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입력시간은 2016년02월01일 13시41분이다. 


비봉 기슭의 절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우뚝 섰던 북한산 비봉 서쪽 기슭에 불광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서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인 향로봉 정상을 향해 40분쯤을 올라가면 향림담(香林潭)이라는 작은 웅덩이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40m가량을 오르다가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제법 넓은 대지가 나타난다. 이 일대에는 누가 봐도 그 옛날에는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웅변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향림사지 축대향림사지 축대 (사진제공=박현욱)


 제법 잘 남은 2단 축대가 있는가 하면, 7단인 돌계단도 있고, 대지를 비롯한 주변에는 건물 주초 혹은 탑과 같은 건축물 일부였을 법한 다듬은 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더불어 기와에 대한 조예가 좀 있다면, 고려 시대 유물임이 확실한 기와 유물도 곳곳에서 수습 가능하다. 또한 근처에는 ‘향림동(香林洞)’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긴 암벽도 있다. 어떤 흔적일까? 어느 시대 어떤 건축물이 있었던 증거들일까? 


향림사지 향림동 암각향림사지 향림동 암각 (사진제공=박현욱)


 향림담이며 향림동과 같은 명칭이 언제 생긴 것인지, 그런 글자를 바위에 새긴 때가 언제인지 모르나 그것이 어떤 역사성을 반영할지도 모른다는 실마리를 삼아 접근하자. 


 조선 전기 때 팔도지리를 집대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필두로 조선 후기 북한산 일대 지도와 북한산 역사를 정리한 조선 후기 지리지로 북한산성 역사를 정리한 《북한지(北漢誌)》 등을 종합하면 이곳이 바로 고려 시대 저명한 사찰 중 하나인 향림사(香林寺)가 있던 자리임은 거의 확실하다. 산 능선 하나 사이에 두고 승가사가 있다. 이 승가사 역시 고려 시대에는 걸핏하면 고려왕이 찾던 유서 깊은 곳이다. 


향림사지 석부재향림사지 석부재 (사진제공=박현욱)


 우선 향림사에 대한 증언을 보면 《승람》에서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해서 부아악(負兒岳)이라 하고 세 봉우리가 인상적이라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일컫기도 한 북한산을 형세를 기술하면서 그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佛巖) 향림사(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된다”고 해서 향림사가 북한산 중에서도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기술 순서로 보아 승가사와 인접한다는 점도 확인한다. 


 나아가 1745년(영조 21)에 편찬한 《북한지》에서는 향림사가 비봉 남쪽에 있으며 “지금은 무너졌다”고 했다. 이로 보아 향림사는 영조 이전에 없어진 절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기록과 현지 사정을 고려할 때 저 앞에서 본 절터가 향림사 자리라고 안심할 만하다. 물론 향림사가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디일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어떻게 결론난다고 해도 우리가 가는 길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는다. 왜 향림사인가? 


경성도(대동여도 1801~1822)경성도(대동여도 1801~1822)


왕건의 죽음과 그를 기억하는 방식  


 918년, 군사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전복한 왕건은 여세를 몰아 935년에는 경순왕의 자발적인 귀부 형식을 빌려 늙은 천년 왕국 신라를 무혈 접수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를 유혈 진압함으로써 후삼국 시대 혼란기를 끝내고 꿈의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이룩한다. 그로부터 7년 뒤이자 재위 26년째인 943년 5월 29일 병오(丙午)에 향년 6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죽은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니 7월 4일이다. 


 그의 죽음에서 장사까지 주요 절차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정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공식 공표하기는 이틀 뒤인 6월 2일 무신(戊申. 양력 7.6)이며, 빈전은 그 다음날 궁궐 안 건물 중 하나인 상정전(詳政殿) 서쪽 뜰에다가 마련한다. 새로운 왕인 혜종은 신하들과 논의해 같은 달 24일(양력 7.28) 경오(庚午)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는 시호(諡號)와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린다. 그러다가 왕건의 시신은 같은 달 26일(양력 7.30) 임신(壬申)에 현릉(顯陵)에 장사지낸다. 모든 장송(葬送) 절차는 이것으로 끝난 셈이다.  


 이런 정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첫째, 왕건은 죽고 나서 딱 27일 만에 묻혔다. 한 달을 하루로 쳐서 27개월간 치러야 하는 삼년상을 27일 만에 끝낸 것이다. 이런 삼년상 방식을 날로써 달을 대신하는 제도라 해서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금 자세히 다룬다. 


 둘째, 빈소는 궁궐 안에 마련했다. 그것이 마련된 상정전(詳政殿)이 지금의 경복궁 근정전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전(正殿)인지 아닌지 확실한 판단은 서지 않으나 정사를 잘 가린다는 뜻이니 정치를 삼간다는 근정(勤政)과 결국은 같은 말이니 아마도 정전인 듯하다. 


 셋째, 왕건의 제삿날은 매년 6월 1일이다. 후대 왕들을 보면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곳을 주로 이날을 즈음한 때에 집중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거니와, 그것은 이날이 제일(祭日)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넷째, 현재 개성에 남은 그의 무덤 현릉 규모를 볼 때 죽고 나서 27일 만에 축조하기는 도저히 힘들다고 생각되므로, 무덤은 왕건 생전에 미리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군주가 생전에 자기 무덤을 만드는 일은 중국에서는 보편적이었다. 이로 보아 왕건 역시 이 제도를 본받아 미리 자기 무덤을 만든 듯하다. 


 이번에는 이일역월제를 살펴보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이 제도를 제5대 경종(재위 975∼981) 때 처음 도입한 듯한 어조로 기록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실제는 이미 태조 왕건 장례에 이 방식을 채용했다. 태조가 이리했으니 그 다음 왕들의 장례 역시 이 방식을 따랐을 것임이 자명하다. 


 고려왕이 이것으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명확한 흔적은 경종의 죽음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경종은 961년 7월 갑진일에 죽기에 이르러 후계자로 지목해 불러들인 사촌동생 개령군 왕치(王治)에게 유언을 한다. 이 유언이 저 두 사서에는 비교적 길게 수록됐다. 개중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상사(喪事) 기간의 경중은 한(漢)나라 제도를 본받아 달을 날로 바꾸어 13일을 소상(小祥)으로 하고 27일을 대상(大祥)으로 하며, 원릉(園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이일역월제다. 부모나 임금의 죽음은 흔히 삼년상을 치른다고 하지만 실제는 만 3년이 아니라 27개월 혹은 25개월이었다. 중국을 보면 25개월인가 27개월인가를 두고 장구한 예송 논쟁을 벌이지만, 고려는 27개월을 선택했다. 


 왜 27개월을 버리고 27일을 선택했는가? 생활의 불편함 때문이다. 왕이 죽으면 상주는 그 다음 왕이 되는데, 차기 왕이 27개월간이나 상중에 있으면 통치가 제대로 되겠는가? 더구나 임금의 만백성의 아버지라 모든 백성이 27개월간이나 상복을 입어야 한다. 


 불편은 이뿐만이 아니다. 저 기간에 왕은 장가도 갈 수도 없고, 민간에서는 풍악을 울려서도 안 되고, 시집 장가도 못 간다. 이런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공자가 그토록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3년상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왕건 역시 죽으면서 “덧없는 생명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는 사뭇 비장한 말과 함께 한나라 황제 문제(文帝)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장례식도 간소하게 치르라고 했다. 그의 아들인 3대 정종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자신의 산릉(山陵) 역시 한 문제의 고사를 따르라는 유언을 했다.


개성 왕건 무덤 현릉개성 왕건 무덤 현릉 (사진제공=오세윤)


 어느 왕조건 건국 시조인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후대 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왕보다 더욱 대대적인 추숭 사업을 벌이게 된다. 왕건 역시 고려 왕조가 계속된 500년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후손들이 그를 기억한 방식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종묘에 신주를 안치해 그를 기린다. 이는 동아시아 어떤 역대 왕조건 같아 왕건만이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다. 둘째,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제작해 각처에 봉안한다.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 역시 이런 면모가 있었지만, 태조 왕건만큼 어진 봉안이 활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셋째, 소상(塑像)을 제작해 추숭한다. 이는 현재까지는 고려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산소인 현릉 배알이다. 이는 현대의 우리한테까지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실은 그 시대 제1의 종교인 불교에서 부처를 추숭하는 방식과 똑같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종묘=대웅전, 산소=탑, 어진=불화, 소상=불상’ 관계가 성립한다. 특히 소상은 틀림없이 불상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 점을 염두해 두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이 왕건의 실제 시신이 있는 곳은 현릉이라는 사실이다. 어진이나 소상은 그 자체가 신주나 시신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 중에서 어진은 궁궐 안에 별도 어진각이 있었음이 확실하고, 고려 수도 개경의 봉은사라는 사찰에도 어진각이 있었다. 이런 어진각을 진전(眞殿)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고유명사도 있었다. 역대 왕들이 왕건을 배알하고자 가장 자주 찾는 곳 중 하나인 이유다. 제2 수도인 서경(西京) 평양에도 어진각이 있어 왕들이 서경을 순행할 때마다 이곳에 빠지지 않고 들른다.  


 고려왕조는 전란과 같은 유사시에는 옮길 수 없는 종묘와 산소만을 제외한 나머지 왕건과 관련한 것들로 옮길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대피시켰다. 종묘는 건물 자체를 옮길 수 없으니 거기에서 신주와 옥책 같은 것만 빼낸다. 


 한데 산소라고 과연 옮길 수 없을까? 요즘 토목기술로는 조금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산소 자체를 옮기는 일도 얼마든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대에 산소 자체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산소 안에서 관만 빼내어 그것을 옮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관을 들고 튄다? 조금은 기괴하나 이런 영화 같은 장면이 실제 있었다. 이것 역시 고려왕조만의 특징이다. 아마도 〈터미네이터〉시리즈 중 하나로 기억하는데, 근육질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한 어떤 영화에서 관을 들고 총질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왕건의 관을 들고 피난 다니는 고려인들을 상상하면서 자꾸만 이 영화 장면이 오버랩한다. 


 유사시에 관을 꺼내 다른 곳에 옮기는 이유는 적이나 도둑이 침입했을 때 보물이 있다 해서 터는 곳으로 왕릉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이 그런 무수한 역사의 교훈을 모를 리 없었다. 무수한 왕릉이 털렸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고구려 미천왕은 죽어서 시신이 전국의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는 역사가 있지 아니한가? 이런 수모를 막기 위해 고려는 유사시에는 관 자체를 무덤에서 꺼내 옮기는 기발한 방식을 생각한 것이다. 


 도전이 있으면 응전이 있는 법이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끊임없는 도굴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것이 비록 귀찮기는 하고, 품이 좀 많이 들기는 하지만, 넋 놓고 당하지만은 않았다. 너희가 하면 우리도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산을 오르는 혼(魂) 


 1010년, 고려는 미증유의 외세 침략에 사직이 백척간두에 달렸다. 그 전해 변방 장수 강조(康兆)가 쿠데타를 통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운 일을 구실로 당시 고려에 대한 종주국을 자처한 북방 거란족의 요(遼) 황제 성종이 직접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친히 거느리고 고려 정벌에 나섰다. 그해 11월 신묘일에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은 그들을 막기 위해 출전한 강조를 통주 전투에서 이겨 사로잡은 다음 파죽지세로 평양을 지나 1010년 봄 정월에는 개경에 들이닥쳐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태묘(太廟)와 궁궐, 그리고 도성 민가가 모조리 불탔다. 거란군이 평양에 도달할 즈음 개경을 탈출한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 거듭 도망치다가 나주까지 내려갔다. 강조를 사로잡고 개경을 함몰했으니 그것으로 정벌 명분은 달성했다고 생각했음인지, 성종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고려로서는 타격이 극심했지만 이만하길 다행일 정도였다. 그래도 현종이 이번 패전을 통해 거둔 성과가 있었으니, 권신 강조를 거란이 처단해주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거란군 침입에 개경이 불바다로 변한 가운데 그곳에 있던 왕건의 무덤 현릉은 온전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역시 고려로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현릉의 막힌 문을 뚫고는 왕건의 관을 꺼내어 미리 다른 곳에다가 대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고려 조정이 언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추진 과정은 남지 않은 듯하다. 이런 사실은 거란 침입이 있는지 5~6년 뒤인 1016년에 가서야 비로소 공개된다. 현종 재위 7년째인 이해 《고려사절요》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봄 정월) 태조의 재궁(梓宮)을 다시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 지난 경술년의 난리 때 부아산(負兒山)의 향림사(香林寺)에 옮겨 모셨다가 이때 와서 그 전대로 장사했다. 


 재궁이란 글자 그대로는 가래나무로 짠 궁전이라는 뜻이지만, 임금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말한다. 옛날에는 그것을 가래나무로 만든 까닭에 이리 부른다. 경술년의 난리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한 거란의 침략 전쟁을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려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아마도 극소수만 아는 가운데 은밀히 현릉 문을 따고는 관을 꺼내어 몰래 향림사에 옮겨다가 놓았음을 알게 된다. 이 향림사가 바로 북한산 비봉 아래 터만 남은 그곳에 있던 사찰이다. 하필 이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밀 보장이 잘 되는 곳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다행히 왕건의 재궁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그것을 이때 이르러 다시 옮겨다가 원래의 자리인 현릉에다가 봉안한 것이다. 왕건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지만, 다름 아닌 태조니깐 이런 특별대접을 받았다. 다른 임금의 무덤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꺼번에 옮길 수 없었으니, 그 자리에 둔 듯하다. 도굴을 피하기 위한 방법 치고는 참으로 절묘했다. 


 한 번 닦아놓은 길은 반복하기 마련이다. 이때 다시 닫힌 현릉은 다시금 문을 열어야 하는 일에 직면한다. 재입관 2년 뒤인 같은 현종 재위 9년째인 1018년, 고려는 다시금 거란 침입의 위험에 봉착한다. 이해 12월 거란이 황제의 사위인 소손녕(蕭遜寧)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보내 다시 고려를 침략한다. 이 전쟁은 고려로서는 두 사람의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결국 거란군을 궤멸하는 대전과를 낸다. 상원수인 평장사 강감찬과 부원수인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끄는 고려군 20만 8천3백 명은 청천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에서 거란군을 박살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고, 거란군 재침 급보를 받은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사절요》 언급을 그래도 옮기면 다시금 “태조의 재궁을 받들어 부아산의 향림사(香林寺)에 옮겨 모셨다” 《절요》에는 이 일이 이해 12월이라 해서 정확한 날짜가 없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신해일이다. 


 이렇게 옮긴 재궁이 언제 다시 현릉으로 돌아갔는지는 모르겠다. 기록이 있는데 내가 놓쳤을 수도 있다. 여하튼 다시 돌아갔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현릉이 다시금 문을 여는 사태가 생겼기 때문이다. 돌아가지 않은 현릉의 재궁이 다시금 문을 나서는 일은 없다.


 여진에 시달리던 거란은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 중심은 여진족의 금에 무너졌지만 생명력은 질겼다. 거란이 망하자 그 남은 종족을 이끄는 두 왕자가 있었으니 금산(金山)과 금시(金始)가 그들이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여진에 압박받은 이들은 아아(鵝兒)와 걸로(乞奴)라는 두 장수를 앞세워 지금의 황하 이북인 하삭(河朔)에 진출해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컫고는 연호를 천성(天成)이라 했다. 마침 이때는 몽고가 칭기즈칸 시대를 맞아 한창 팽창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라 대군을 일으켜 대요수국을 친다. 


 몽고에 밀리자 거란 잔당은 동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하니 고종 3년 8월에는 마침내 아아와 걸로가 이끄는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 영역을 침범했다. 이들이 개경까지 위협하자 고려에서는 다시금 현릉 문을 딴다. 이듬해(1217)에는 태묘에 봉안한 신주를 태상부로 옮기는 한편 태조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왕륭의 재궁까지 함께 이번에는 봉은사(奉恩寺)로 옮긴다. 이 봉은사는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가 아니라 개경 근처의 절로서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이에 대한 묘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약간 다르다. 즉, 《고려사절요》에서는 이해 3월에 “태묘의 신주를 태상부(太常府)로 옮기고, 태조와 세조의 재궁은 봉은사(奉恩寺)로 옮겼다”고 해서 이들 사건이 마치 동시에 일어난 듯 기술했지만, 《고려사》는 각기 다른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언급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먼저 3월 병술일에 동면도감(東面都監) 판관인 이당필(李唐必)을 보내 태묘에 봉안한 신주를 태상부(太常府)로 옮기게 하는 한편 장군 기윤위(奇允偉)는 현릉(顯陵)으로 보내서 태조의 재궁을 봉은사(奉恩寺)로 옮기게 했다. 태상부는 주로 제사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한 정부기구다. 


 이어 같은 달 무자일에는 장군 신선주(申宣冑)를 세조가 묻힌 창릉(昌陵)으로 보내 세조의 관을 봉은사(奉恩寺)에 옮기게 하고, 또 개장후릉도감(改葬厚陵都監)을 설치했다가 얼마 후 없앴다고 한다. 개장후릉도감이란 강종의 능인 후릉을 옮기기 위한 총감독 (임시)기구라는 뜻이므로 이때는 강종 능도 문을 열어 그 관을 꺼내려했다가 중단한 셈이다. 왜 중단했을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계속 《고려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다음 달인 여름 4월 신유일에는 “태묘의 아홉 실에 안치한 신주는 공부청(工部廳)으로, 각 능의 신주는 고공청(考功廳)으로 각각 옮겼다”고 한다. 공부청은 토목공사 전담 관청이고 고공청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담당한다. 


 한데 같은 《고려사》에서 한 달 전에 옮긴 태묘 신주를 이때 다시 다른 데로 옮겼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언뜻 나는 모르겠다. 한 달 전에 태상부로 옮긴 신주들을 도로 태묘에 갖다 놓았다가 이때 다시 옮겼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록의 착오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두 사서 사이에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이해 3~4월 무렵 거란의 침입에 즈음해 고려가 다시금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릉 일부 문을 땄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한다. 태조는 벌써 세 번째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이쯤이면 요새 납골함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바다를 건너는 시체 


 그렇다면 죽은 왕건의 유랑은 이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가?  


 고려는 이제는 뒤안길로 사라진 거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해 새롭게 북방의 강자로 대두한 여진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강한 세계제국 몽골의 원(元)이라는 강적을 만났다. 이때도 여전히 고종이 왕인 시절이다. 하지만 실권은 최씨의 무신정권에 있었다. 그 시초를 연 최충헌 이래 최우 등을 거쳐 장기 집권한 무신정권은 몽골에 대한 무력투쟁을 선언하고는 그 일환으로 개경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 옹성 투쟁은 무려 30년을 계속했다. 칭기스칸 손자로 원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황제 쿠빌라이 칸이 훨씬 나중에 한 말을 빌린다면 그들에게 30년간이나 대항한 나라는 없었다. 그만큼 무신정권 하 고려의 대몽골 투쟁은 끈질겼다. 


 강화 천도는 고종 19년(1232), 최우 집권기에 있었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번에도 고려는 현릉의 문을 땄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왕건만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화를 향해 고종은 7월 을유일에 개경을 출발해 이튿날인 병술일에 강화 객관(客館)에 도착했다. 이 즈음해서 현릉의 재궁 역시 빼서 강화도로 간 것이 분명하지만, 정확한 시점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아예 이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며, 대신 《고려사》에는 이해 말미에다가 “이해에 세조와 태조의 재궁을 새 도읍으로 이장했다(是年, 移葬世祖大祖二梓宮于新都)”고만 언급할 뿐이다. 


 이때 두 재궁을 어디에다가 어떻게 모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향림사라든가 봉은사의 전례를 미루어 본다면 강화도 어떤 사찰에 안치했을 공산이 크지만, 간단치는 않다. 《고려사》에서는 분명히 이때 ‘이장(移葬)’했다고 했다. 이는 종래의 안치하고는 다르다. 관을 어떤 건물 안에 두는 행위가 아니라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어디엔가 묻은 것이다. 강화도에서 발굴조사한 왕릉급 무덤 중에는 예컨대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능내리 무덤이 있다. 전호에서 간단히 소개한 곳이다. 혹여 이런 곳이 왕건릉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번 강화 피신에서도 왕건은 봉은사에서 그랬듯이 아버지와 함께했다. 한데 이번 유랑은 왕건에게는 좀 길었다. 이런 사실은 우리는 두어 군데 기록에서 간접 확인한다. 1232년 강화도로 들어간 고려 조정은 1259년 몽고에 공식 항복하면서 3년 안에 개경 환도를 약속했지만 질질 끌다가 마침내 1270년 원종 11년에야 마지못해 강화도를 떠나 뭍으로 다시 상륙한다. 


 이해 《고려사》 원종 세가 말미에는 발생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채 “이해에 이판동(泥板洞)에다가 건물을 지어 세조와 태조의 재궁과 봉은사의 태조 소상(塑像)과 구묘(九廟)의 신주를 임시로 안치했다”고 한다. 이판동은 개경(開京)의 나성(羅城) 안에 있던 지명으로, 십자가(十字街)에서 숭인문(崇仁門) 쪽으로 가는 방면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지명이 어쩐지 벽돌공장 밀집지역, 혹은 성을 쌓은 기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 같은 느낌을 준다. 


 이로 보아 개경 환도 때 왕건의 재궁 역시 같이 복귀했음을 알 수 있다. 38년 만이었다.


개성 왕건 무덤 현릉개성 왕건 무덤 현릉 (사진제공=오세윤)


 임시 안치한 왕건의 관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사》 충렬왕 세가를 보면 그 2년(1276) 갑진일에 “다시 세조(世祖)의 재궁을 창릉(昌陵)에, 태조의 재궁을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에는 날짜를 밝히지 않은 채 이해 9월조에 이와 같은 말을 적어놓은 다음 “이전에 (강화도로) 천도할 때 두 재궁을 강화로 이장했다가 이때 와서 모두 옛 능으로 회복했다”는 새로운 말이 보인다. 강화 천도가 고종 19년(1232)의 일이니, 왕건의 재궁은 정확히 44년 만에 다시 제집을 찾아든 셈이다.  


 이후에는 내가 현릉 문을 다시 국가의 공식 차원에서 땄다는 흔적을 보지 못했다. 1392년 고려 왕조가 패망하고 신왕조인 조선이 개창하면서 왕건도 이제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참고문헌>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재발굴조사단,  《북한산의 불교유적》, 1999 

한국역사연구회 편,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비평사, 2002


<도움주신 분>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고려 시대 일력 계산

박현욱 경기문화재연구원 주임 : 향림사지 관련 사진 등 자료 소개  

오세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 : 태조 왕건릉 사진 제공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