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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남수문南秀文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by taeshik.kim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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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금속활자본 고려사 

 

이 증언은 《고려사》 찬수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큰 인물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시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그의 항목에 의하면 남수문은 1408년(태종 8)에 나서 1442년(세종 24)에 사망했으니, 요절에 가깝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字를 경질景質, 경소景素  혹은 경재敬齋라 했으며, 집현전 부수찬, 집현전 응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했다 했으니, 주로 문한文翰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라는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 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 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 발문도 썼다. 그 뒤 예문관 응교·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전箋·기·묘지 몇 편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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