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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관기官妓 유지를 외친 허조를 위한 변명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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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기생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卷之九에 수록된 일화 중 하나다. 


허문경공(許文敬公)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자제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큰아들인) 후(詡)와 (둘째아들인)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겠소”라고 했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논박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획을 세웠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 소속이니, 취해도 무방한데,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시행하면 (국내에 임금의)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그릇되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죄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고 해서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공창을) 그냥 두고 없애지 않았다.

許文敬公操心淸厲。治家嚴而有法。敎子弟皆用小學之禮。毫忽細行皆自謹。人言許公平生不知陰陽之事。公笑曰。若我不知陰陽之事。則詡訥從何而生。時有欲革州邑娼妓之議。 命問於政府大臣。皆曰。革之可當。惟未及於公。人皆意其猛論。公聞之乃笑曰。誰爲此策。男女人之大欲。而不可禁者也。州邑娼妓。皆公家之物。取之無防。若嚴此禁。則年少奉使朝士。皆以非義。奪取私家之女。英雄俊傑。多陷於辜。臣意以爲不宜革也。竟從公議。仍舊不革。


기생 혹은 공창의 존재를 여성 억압의 대표 증상으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이런 허문경공 허조許稠야말로 역적 중의 역적으로 지목해, 그가 아니었으면, 가장 추악한 공창제는 한국사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을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맥락을 세심히 보면, 당시 사대부 혹은 권세 있는 남성 중에 허조만큼 실제와 이론 모두 철저히 남녀 관계를 포함한 도덕철학을 겸비한 인물이 없다. 허조야말로 여성을 단순한 성적 도구로 삼는 남성 본능을 스스로 가장 처절히 억제하며 산 인물이다. 

저를 보면, 공창제 폐지 논의를 붙였을 때, 압도적인 여론은 폐지로 기울었다. 그런 판국에 허조의 말 한마디로 그 흐름이 역전되어, 도로 유지하는 쪽으로 모아졌음을 알 수 있다. 허조가 권력이 강해서 그리했겠는가? 저 맥락을 보면, 허조야말로 진정한 도덕군자로서, 누구나 그 폐지에 강력 찬동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기대한 허조가 다름 아닌 반대를 들고 나오니, 여론이 일시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예컨대 첩과 기생을 끼고는 질펀하게 노는 대신이 저런 주장을 했더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조가 주장하니깐 여론은 일시에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저와 같이 증언한 성현은 허조가 사망한 그해에 태어났으니, 역사적 실상을 잘못 알고 저리 기록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가 증언하는 당대의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을 본다. 이에 의하면 허조는 세종 21년, 명 정통(正統) 4년, 1439년 12월 28일 壬寅에 좌의정에 있다가 졸(卒)하니, 향년 71세였다.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 허조는 자(字)가 중통(仲通), 17세에 진사시(進士試),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각각 입격하고 경오년에 과거에 붙어 관직에 올랐으니, 조선왕조 개창 이후 태종을 거쳐 특히 세종시대에 승승장구해 정승 반열에 올랐다. 그는 예제(禮制) 전문가로서 그 복구에 힘을 쏟았으며, 특히 막 수입되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거해 일제 불교의식을 배격하고 시종일관 부모상을 치렀으며, 매양 어머니 기일이나 시제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손수 짜준 겹옷을 입었으며, 일찍이 자손에게 명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 옷으로 염습하라”는 유언했다. 


장녹수가 된 이하늬


이 날짜 그의 졸기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명(遺命)으로 (그 자신의) 상사(喪事)는 일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르게 하고, 또 외가(外家)가 후손이 없으니 삼가 묘제(墓祭)를 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부음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매우 슬프게 여기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고기〉 반찬을 거두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관(官)에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낮이나 밤이나 경계(警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동궁(東宮)에서도 역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하였다. 조(稠)는 성품이 순진하고 조심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사서(四書)》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의 여러 책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좋아하여 읽었다. 비록 갑자기 당하였어도 빠른 말과 당황하는 빛이 없었으며, 제사(祭祀)를 받들기를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형(兄)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고,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용이 있었으며, 반드시 경조(慶弔)와 문병(問病)을 친히 하였었다. 항상 한 사람의 창두(蒼頭)를 시켜서 명령을 전달하였고, 문 앞에는 정지해서 있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대(待)할 때에는 반드시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엄히 하였다.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며, 옷은 몸 가리기만을 취(取)하고, 먹는 것은 배를 채우는 것만을 취하여, 싸서 가져오는 것을 받지 아니하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희롱하고 구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관(官)에 있을 때는 상관(上官)을 섬기기를 매우 존경(尊敬)히 하고, 요좌(僚佐)를 대하는 데에는 엄격하게 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히 하고,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있으니 허후(許詡)와 허눌(許訥)이다. 


성현의 증언과 일맥으로 상통하는 평가다. 허조는 명실공히 주자성리학이 요구한 도덕과 윤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물론 주자성리학이 性을 멀리하는가 하는 논제가 유발될 수 있겠지만, 그는 분명 본처 외의 여성을 멀리하려 했으며, 그에 나름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허조가 “음양의 일”, 다시 말해 섹스를 모른다는 주변의 증언에서 명확히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공창제를 유지케 한 허조를 향한 작금의 비난은 부당하기만 하다.  

참고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가 채록한 허조는 다음과 같아 소개한다.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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