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가 급격히 종이 시장에서 퇴출하면서 급속도로 그 중대성이 동시에 떨어져 지금은 밭두렁에 그 편린만 계우 남은 닥나무꽃이다.
이 닥나무는 내 기억에 여름철 정도인가에 베어 이파리를 땄던가 아니면 그대로인가는 모르겠는데 대따시 큰 가마에 쪄서 저 껍데기를 홀라당 벗겼으니 거무틱틱한 저 껍데기는 다시 벗겨내곤 속살만 거두어 그걸로 종이로 가공해 냈다.
저 겉껍질을 벗겨내는 도구가 따로 있거니와 그 이름은 내가 망실했으니 고고유물 중에 그걸로 보아야지 않을까 하는 실물을 접한 적 내가 있는 듯하다.
무론 나 역시 어린 시절 저런 닥나무를 베고 지게에 져다 나르곤 했거니와 지게로 져낸 닥나무는 리어커에다 싣고는 십리길 닥가마로 옮겨다 주었으니 가격은 어찌 계상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걸 키우는 데는 거의가 논두렁이었으니 대개 뽕나무랑 같이 심었다. 뽕은 누에를 쳤고 닥나무는 그 뽕이 다 떨어졌을 적엔 그 대용으로 누에를 먹이기도 했는데 이게 누구한텐 그닥 좋은 식재료는 아니었다. 닥풀을 먹은 누에는 무엇보다 그 똥색깔이 달랐다.
닥은 삶는 냄새가 묘한데 그 닥가마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주요하진 아니했지만 그런대로 농가수입원이기도 했다.
뽕이나 닥은 이파리를 초식동물이 아주 좋아하는데 그 높이 때문에 염소보단 소먹이로 희생되곤 했으니 무론 그걸 따서 토끼를 먹이기도 했다.
가마에서 쪄낸 닥껍질은 실제 그걸 풀어쪄서 종이를 만들어내는 제지공장으로 다시 옮겨가는데 우리 동네선 그 종이가마가 새재 봉곡사 사하촌寺下村에 있었다.
섬유로 변한 닥은 풀처럼 변하는데 그걸 밑이 새는 판에 쳐서 물기를 빼면 종이 전단계라 그걸 다시 벌겋게 달군 가마솥 같은 바닥에 쫙 펼치면 순식간에 물기가 날아가 우리가 아는 한지가 된다.
왜 사하촌인가? 사하촌이란 글자 그대로 절 아랫동네를 말하거니와, 이런 동네는 예외없이 그 절에 경제로 예속된 농민들이 사는 데다. 다시 말해 그 절이 소유한 경지를 부쳐먹는 사람들이다. 사하촌이라면 김정한의 동명 제목 소설을 떠올리게 되거니와, 그 소설은 이미 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 사하촌 이야기에도 이 닥나무공장 얘기는 없어 내가 어린 시절 그 작품을 읽고는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더랬다.
암튼 사하촌=한지공장이라는 등식은 신라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질긴 유습이어니와 절은 그 자체가 지역경제공동체 중심이라 그 일환으로 제지봉장을 부업으로 삼아 짭짤한 수익을 냈다.
무론 조선시대는 불교탄압과 더불어 절에 부과한 공납이 되는 바람에 중들이 이걸 만들어 내느라 피똥을 쌌다.
닥꽃을 보고 격발해 아득한 그 시절 기억의 일단들을 꺼내어 몇 줄 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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