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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도림(道琳)

by taeshik.kim 201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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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21년(475)…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며 말했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난 것이 늦었음을 한탄했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상(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습니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다”고 말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尒)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다. 논한다.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걸루(杰婁) 등은 스스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도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임금을 결박하여 죽였으니 그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이르기를 “그러면 오자서(伍子胥)가 영(逞)에 들어가서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한 것은 어떠한가?” 하니, 이르기를 “양자법언(楊子法言)에 이를 평하여 ‘덕(德)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것은 인(仁)과 의(義)일 뿐이니 자서(子胥)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짊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논한다면 걸루 등의 의롭지 못함은 명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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