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퀸Tarquin이 부상하자 왕비 타나퀼Tanaquil은 그가 숨을 쉬고 있을 때 재빨리 그를 궁전으로 옮겨갔다.
나중에 그녀는 궁전 창문에서 모인 군중에게 연설을 통해 타르퀸이 죽기 전에 왕이 될 다른 사람을 지명했다고 말했다.
리비우스Livy가 "왕뿐만 아니라 원로원과 백성 모두에게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고 진술한 사람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였다.
첫 행동으로, 툴리우스는 권력 쟁취에 눈이 먼 왕의 암살한 자들을 체포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역시 에트루리아인이었지만 타르퀸과는 친척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왕이 뒷배를 봐주는 젊은이 프로테게protégé로 입양되어 궁전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자 그는 신임받는 왕의 조언자가 되었다.
그는 초라한 배경을 딛고서 왕의 딸과 결혼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우스라는 이름은 툴리우스가 노예(라틴어로 servus)의 아들이었음을 암시한다.
로마 왕이 그러한 배경을 지녔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역사학자 T. J. 코넬은 툴리우스의 혈통이 로마인들에게 "수치스럽고 당혹스럽다"고 썼다.
아마도 그의 통치에 합법성을 더하기 위해, 툴리우스를 신성한 존재와 일치시키는 이야기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전설적인 로마의 여섯 번째 왕이자 에트루리아계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다.
기원전 578년부터 535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로마와 그리스 문헌에는 그의 비천한 출신과 이후 기원전 579년에 암살된 로마의 첫 번째 에트루리아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쿠스의 딸과의 결혼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의 즉위에 대한 합법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대중과 왕실의 지지로 왕위를 얻었으며 원로원의 선출 없이 즉위한 첫 번째 로마 왕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몇몇 전설에서는 세르비우스 아버지가 신성한 혈통이라 묘사하며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의 어머니가 라틴 공주라고 한다.
세르비우스는 인기 있는 왕이었다. 군사정벌에 업적이 있었고 도시도 확장했으며 각종 축제를 조직해 성공했다.
결국 그는 자만심에 믿은 자기 딸과 사위한테 배신당해 재위 44년 만에 암살됐지만 역설적으로 로마에서 군주제가 폐지디고 로마공화정이 가는 길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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