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조선 사람들이 떠밀려오거들랑>
조선은 바다를 즐기지 않았다. 바다 밖에서 온 것들은 물리치기 일쑤였고, 바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사방이 바다인 제주의 경우, 거기서 나는 토산품은 꼬박꼬박 공물로 바치라 하면서 정작 거기 사는 사람이 배를 타고 나가는 일은 크게 경계하였다.
오죽하면 1629년(인조 5)부터 근 200년간 제주 사람은 육지에 올라오지 말라는 출륙금지령을 다 내렸을까.
그래서 탐라 시절엔 분명 대단했을 제주의 조선술은 퇴화를 거듭, 진상품을 나르고 조금 멀리 나가 고기잡는 데 쓰인 '덕판배'나 연안에서 고기 낚는 데 쓰는 '테우' 정도만 남았다.
고유섭 선생 표현처럼 '바다를 엔조이한' 장보고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기잡이건, 공무건, 과거시험 응시건....
그런데 나무 돛단배를 타야 하던 시절이므로, 상당히 높은 확률로 풍랑을 만나 원래 가려던 길을 잃고 바다 위를 떠돌게 되는 일이 생긴다. 이른바 '표류漂流'다.
인류가 '배'라는 것을 만들고 바다에 나서면서부터 존재했을 표류는,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기록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인다.
지금 서남해 밑바닥에서 제법 나오고 있는 고려시대 난파선은 분명 그 선원과 승객의 표류가 있었을 것임을 증언한다.
조선시대에도 표류는 적지 않았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표류민 대우는 의외로 관대했다.
사방천지 짠물투성이인 바다를 떠다니다가 겨우 육지를 밟거나 배를 얻어탄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유원柔遠의 법도를 베풀어, 잘 먹이고 후하게 대접한 뒤 위로금을 주어 저 살던 곳으로 고이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화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하멜이나 벨테브레는 뭐냐고 물을지 모르겠는데, 그건 명청明淸 교체라는 16~17세기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관련된 일종의 예외였다.
어쨌건, 그렇게 표류민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다에 나가 떠도는 '고표故漂'가 등장하기도 했다.
표류한 곳에서야 이걸 구분할 도리가 없으니 오면 오는 대로 (예산을 들여) 대접해 돌려보내야 한다.
청나라로 표류한 사람이라면 으레 베이징에 왔던 연행사 편에 돌려보내는데, 표류민을 인수인계하고 대화를 해보니 뭔가 의심스럽다는 평을 자기 일기에 적어놓은 사신도 있었다.
하지만 격동의 19세기 말이 되면 그런 '좋았던' 시절은 끝을 맺는다.
표류민 처리가 극히 사무적으로 변하고, 그들을 거둬 먹이고 입히는 데 드는 비용을 상대국 정부에 청구하게 된다.
여기 이 문서는 그렇게 사무적으로 변해가던 표류민 대우의 한 조각을 보여준다.
일본 메이지 6년(1873) 와카야마현에 공포된 법령 문서다.
이로부터 5년 전인 1868년 6월, 에도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일본 신정부가 포고한 <조선국표류인취급규칙朝鮮國漂流人取扱規則>의 2조를 개정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인데, 그렇게 개정된 내용이 무엇이냐?
일본 옛글인 소로분候文 문법을 잘 모르지만 다행히 한자가 많아서 때려 맞춰가며 읽어볼 수는 있었다.
조선 사람이 우리나라[일본]에 표착했을 때 사쓰마[가고시마], 히젠[사가] 등 나가사키에 가기 편한 지방은 표류민을 나가사키 현청으로 보내고, 사가현 아래 가라쓰로부터 동북쪽에 있는 치쿠젠[후쿠오카 서부], 부젠[후쿠오카 동부], 나가토[야마구치], 이와미[시마네 서부], 이즈모[시마네 서부] 등 기타 여러 고을에 표착하면 그 관할 관청에서 가까운 바닷가에서 바로 쓰시마에 있는 나가사키현 지청으로 보내라는 뜻이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일본 각 지방을 중앙 공무원이 파견되어 통치하는 현縣으로 개편하였음에도, 본문에서는 사쓰마, 히젠 같은 옛 번의 이름으로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관성이란 확실히 무서운 것이다.
또 당시에도 조선 표류민이 심심치 않게 일본에 흘러가고 있었고, 그 범위가 조선에 가까운 규슈 쪽만이 아니라 후쿠오카, 야마구치, 시마네 같은 혼슈 서쪽까지 이어졌다는 게 흥미로웠다.
이 문서가 배포된 와카야마에도 어쩌면 왔을지 모르겠고.
1873년이면 조선에선 흥선대원군이 퇴진하기 직전이고, 두 차례 양요를 거친 뒤 운요호雲揚號 사건(1875)으로 강화도가 다시금 전화戰火에 휩싸이려 하던 시절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금 입이 텁텁해지는데, 저 얄팍한 종이는 어떻게 찢어지지도 않고 150년 세월을 버틸 수 있었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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