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본에 따라 실례랑(失禮郞)이라고도 하니,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 따른 혼동이다. 신라 신문왕 때 화랑으로 문객 1천 명을 거느렸다. 북쪽 금란(金蘭)으로 갔다가 인근 적국 사람들한테 사로잡혀 목축에 사역됐지만, 신이한 행적으로 돌아왔으니, 이 일을 기념해 만파시적을 만만파파식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2 기이 2 만파식적 :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리공(理恭·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 왼편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백률사(栢栗寺) :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 남쪽에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고 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말하기를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 밟은 돌 위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인 자취다"고 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이 대현(大玄) 살찬(薩喰)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693) 3월에 부례랑이 무리를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가서 북명(北溟)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이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오직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가니 이때가 3월 11일이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혔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며 조사케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이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고 4월에는 나라 안 사람을 모아 말했다. "현금과 신적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가 매우 기뻐하며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했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 들에서(혹은 도구都仇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 하시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스님이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 부처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이 절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해 대각간(大角干·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 아찬(阿喰)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 경정궁주(鏡井宮主)로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은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5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는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하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cf. 실례랑(失禮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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