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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부여 정림사를 어찌 보아야는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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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상육




‘수박, 백제, 삼천궁녀, 의자왕, 백마강’ 하면 부여가 떠 오른다. 그리고 오층석탑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오층석탑은 백제 때 만든 탑 이상에 대해서 이론이 많다.

물론 백제가 망하고 난 직후 만들어졌다고도 얘기할 정도다.

우선, 오층탑이 세워진 절의 이름부터 문제이다. 定林寺(정림사)는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조각에 새겨진 이름이다.

이 점은 그 이전부터 정림사로 불렀을 개연성이 높인다.




그럼, 정림사는 언제 지어졌는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전후(6세기 중반) 혹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로 보고 있다.

두 의견 모두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다만, 소조상, 6세기 중후반대의 연화문와당, 깨진 기와 조각을 쌓아 만든 건물의 기단 형태 등을 통해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직후인 6세기 중반으로 보고 싶다.




왜냐하면,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생산품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공주 대통사에 사용한 판단원형돌기식의 연화문와당이고, 이 기와는 부여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와당이 정림사에는 거의 없고, 정림사식(판단첨형)의 와당이 다수를 점한다.

즉, 천도 전, 사비도성의 기본적인 구조(외곽성인 나성과 왕궁 및 왕성)는 만들어지고, 백제가 천도한 후 점진적으로 도성이 채워져 가는 첫 단계에 정림사가 만들어진 것 같다.




최초의 정림사 탑은 목탑인가? 석탑인가?. 목탑으로 본다.

왜냐하면, 탑과 금당을 감싼 회랑 안쪽에서 탑과 금당 내부를 장식한 소조상이 다수 출토되었고, 석탑보다 넓은 탑 기초시설(축기부) 그리고 석탑보다 시기가 빠른 사찰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목탑은 무슨 연유에서 석탑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612년 대홍수와 관련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 시기는 정림사에서 출토된 와당의 형식 편년의 중심이 6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이 기와의 사용을 인정하면 7세기 전반이 아닌가 한다.

이즈음 석탑 남편에 연못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시점에 정림사는 화염에 휩싸였을까?

발굴자료로 보면 회랑과 강당의 터에서 불탄 흔적이 관찰되었다고 하지만, 석탑에서는 그 당시에 불탄 흔적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백제가 망할 당시에 정림사는 사찰의 기능이 저하될 정도로 사역에는 훼손이 있었을 수 있지만, 오층탑과 연못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정림사가 운영되지 않았나 한다(연지에서 인화문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음).

나아가 사역 내에서 통일신라시대 소수 와당(보수와) 등과 당시의 토기류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는 별다른 개축은 없이 사용된 듯하다.




1028년 정림사에는 석조불상이 축조되고, 대장전이란 건물에 안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다.

그럼 이 당시 정림사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연지는 이미 주변 퇴적토로 매몰되었고, 그 북편에 사찰 중문이 남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동회랑과 서회랑 안에 석탑과 금당이 존재한 모습이다.

그리고 석조불상이 있는 대장전이 남북 일직선으로 공존하는 모습이다.




좀 이상은 하다.

금당이 두 곳이라는 점과, 기존 금당도 새로 지었으면 정림사 사역 내에서 격이 가장 높았을 것이기 때문에, 금당에 사용하는 기와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지만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장전과 금당이 공존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정림사는 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 내리는 2024년 5월 5일, 아침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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