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 & 漢文&漢文法

북두로 은하수 길어 끓이는 차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2. 12.
반응형

인월대(隣月臺)


[高麗] 진각 혜심(眞覺慧諶)


높디높디 솟은 바위 몇길이나 되는지 

위에 선 높은 누대 하늘 끝과 닿았네

북두로 은하 물 길어 차 달이는 밤 

차 끓는 김 찬 달속 계수나무 감싸네


巖叢屹屹知幾尋, 上有高臺接天際. 斗酌星河煮夜茶, 茶煙冷鎖月中桂. 



고려의 다실茶室?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에서.




인월대가 어딘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그 의미를 미루어 달[月]과 인접[隣]하는 곳에 세운 누각이라 했으니, 아마도 제법 높은 언덕이나 산꼭대기에 세운 건축물 아닌가 한다. 혹 그 실체를 아는 분은 가르침 구한다. 이 시 첫 두 구절 '巖叢屹屹知幾尋, 上有高臺接天際'는 제목도 그렇고, 그 묘사하는 내용으로 보건대 인월대라는 누각을 묘사한 것이어니와, 이로써 보건대 인월대는 바위산 꼭대기에 세웠다. 


이런 곳에서 어느날 밤 혜심은 차를 달였나 보다. 마침 밤하늘엔 보름달 가까운 달이 휘영청 뜬 모양이다. 달에는 옥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서 불사약을 찧는다 했거니와, 이런 풍경은 보름달 가까운 때가 성립가능한 까닭이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에 무슨 옥토끼나 계수나무가 보이겠는가? 


이 시 압권은 3, 4구이거니와, 차를 끓이는데 부은 물을 작자는 북두로 길어온 은하수라 했다. 북두란 곧 북두칠성이니, 그 모양이 흡사 자루 달린 바가지, 곧 국자다. 이 북두칠성으로 은하를 흐르는 물을 퍼왔다 했으니 말이다. 은하銀河는 글자 그대로는 은빛 큰강물이거나, 별무리가 길게 늘어선 모양을 따라 이리 묘사한다. 


그렇게 물에다가 찻잎을 넣고 차를 끓이는데 김이 모락모락한다. 그 김이 마침 달을 가린 모양이다. 달은 이글거리는 해에 견주어 항용 그것을 온도로 묘사할 때는 冷 혹은 寒으로 본다. 그 찬 기운을 응축한 달에 뜨거운 찻물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맺힌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이 시는 분명 선시禪詩에 속한다. 


이 시는 1993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소장 필사본(筆寫本)을 저본으로 편찬한 《한국불교전서》 제6책 소수所收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 수록되었다.  


그렇다면 혜심은 누구인가? 그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혜심'이라는 항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178년(명종 8)∼1234년(고종 21). 고려 후기의 승려. 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법명은 혜심(慧諶).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완(琬)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사주(社主)가 되어,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원하였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다음해 어머니가 죽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를 만들어 교화 활동을 하고 있던 지눌(知訥)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다음,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힘써 정진하였으며, 지눌은 혜심의 재능을 아꼈다. 


1210년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혜심이 수선사로 돌아가 개당(開堂)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이 수선사를 증축시키고 불법을 구하므로 그가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고, 당시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고종(高宗)은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를 제수하였으며, 1220년(고종 7)단속사(斷俗寺) 주지로 명하였다. 1234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문인에는 몽여(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 『심요』 1편,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2권, 『금강경찬(金剛經贊)』 1권, 『선문강요(禪門綱要)』 1권이 있다. 


고종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라남도 강진군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현재 비문은 잔비(殘碑)만이 전해 오고 있으며,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조선금석총람』 등에 그 글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동문선(東文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총독부,1919)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 이능화 ,신문관,1918)

집필(김위석,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개막한 '대고려전' 중 한 코너가 고려시대 차문화 섹션이라, 개중 한 구석에 고려인들이 사용한 다기茶器를 비롯한 차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했거니와, 마침 그 벽면에 저 시가 걸려있어 인용해 본다. 번역은 내가 나름대로 다시 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