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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서희와 강감찬, 그 공통분모 강동6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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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막연히 한 세대 정도 차이나는 줄 알았지만,

실제 생몰년을 비교하면 

서희徐熙가 942~998년이고

강감찬姜邯贊은 948~1031년이라 

불과 여섯 살 차이라, 실상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 

두 사람 사이가 뜨게 보이는 까닭은 저들이 역사에 두각을 드러낸 고려와 거란간 전쟁에서 주역이 된 시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서희가 그의 이름을 영원히 아로새긴 계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993년, 요 성종聖宗 통화統和 11년, 고려 성종成宗 12년, 요나라가 소손녕을 총대장으로 하는 고려 정벌군 80만 대군을 일으켰을 때라, 이때 서희는 적진으로 혈혈단신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려 이른바 강동6주(강동육주)를 획득했다. 
 

저 강동6주가 정확한 지점인가? 모르겠지만, 저 일대일 것이다.

 
같은 문신인 까닭에 둘은 비슷한 관로를 거쳤다.

강감찬은 성종 3년, 983년에 과거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서희가 담판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기 10년 전이다.

따라서 서희 담판 당시 내가 자세히 조사는 아니했지만 관위가 그리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감찬한테 축복은 엄청난 장수에 있다. 오래 사는 놈이 이기는 세상은 그때나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두 사람이 라이벌 관계였다거나 얼마나 교분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자료가 없지만 말이다. 

현종 원년, 1010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으로 침입해 서경이 함락당하고 개경이 불타는 와중에 현종은 나주까지 줄행랑을 쳐야한 이 전쟁에서도

강화를 반대한 그는 현종 9년, 1018년에는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라는 중앙 관직과 서경 유수라는 외관직은 아울러 겸하는 파격 인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해 요나라 성종이 친히 소배압蕭排押을 내세워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자 상원수로서 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아가 대승을 이끈다. 

서희가 죽은지 20년이 지난 일이고, 강동 6주 담판 기준으로는 25년이 지나서다. 

서희와 강감찬 사이에는 강동 6주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서희가 담판으로 획득한 강동6주를 내놓으라고 요나라가 훗날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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