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가 5백년을 지속했으니
그 종친 숫자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이 왕실 종친은 비교적 세계가 뚜렷해지는 고려말 세계를 상고해 보면
당시 한다 하는 집안들과 얼키고 설키어 조선 전기처럼 지배층의 혈연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여말 선초의 격동을 넘어 살아 남은 당시 현달한 집안들은 족보를 보면
개성왕씨와 혈연관계가 있는 집안이 많다.
그런데 조선 건국 이후 알다시피 왕씨는 거의 사라졌으니
이처럼 집안 자체가 소멸하다시피한 것은 여말선초 사실
개성왕씨 외에는 없다.
나머지 고려에 충절을 지켰다던가
아니면 두문동에 들어갔다던가 하는 집안들은 대부분 그 신빙성이 의심스러우니,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사람들은 정몽주 길재 등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신왕조 벼슬을 받았다.
마치 조선이 망할 때 세족 대접을 받던 이들이
일제강점기가 되자 조선귀족으로 모습을 바꿔 단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누가 봐도 조선의 건국을 주동하고 적극적인 신왕조의 개창자임이 분명한 집안과 사람들도
두문동에 들어갔다고 우기는 기록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이는 일제시대 귀족 작위를 받은 이들이 사실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어차피 그렇게 이야기해 봐야 누구도 안 믿겠지만 적당히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각설하고-.
조선은 왜 그렇게 왕씨를 절멸시키다시피 했을까.
필자가 보기엔 물론 왕씨의 반란과 왕씨 판 광무제를 두려워 한 것도 있겠지만,
조선왕조 개창이후 왕실 땅이 나올 곳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앞에서도 썼지만, 신왕조가 개창되면 새로운 토지제도 하에서 종친에게 토지를 분급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 덩어리 크기가 어마어마한 데 반해
도대체 이 땅이 나올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겠다.
따라서 여말선초
좀 심하다 싶은 억불숭유,
그리고 왕씨의 척결 배후에는
신왕조 종친과 공신에게 분급할 땅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려의 개창 당시에는
후백제의 지배층 땅을 몰수하여 왕씨의 그것으로 삼으면 되는 바,
신라 김씨와 신라 땅 호족들은 그 때문에 살아남았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한데,
조선의 개창 당시에는 후백제에 해당하는 지역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겠다.
결국 땅이 나올 곳은 사찰과 이전왕조의 왕과 종친의 땅이 가능 문제가 되는 바,
고려사에 나와 있는 사전혁파의 기록,
공양왕이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는 아래 토지 대장을 붙태웠다는 기록이 과연
전국의 모든 토지 대장을 태워버렸다는 뜻일까?
아마도 신정부에서 접수할 땅,
과전법 체제로 묶어 버릴 땅을 위주로 태웠을 것이며,
그 대부분은 왕씨의 땅, 고려시대의 공전, 사찰의 땅 서류가 아니었을까 하며
그 나머지 지역의 사전들은 과전법 출범 후
의제적 과전과 공전의 형태로 분식했을 뿐,
여전히 그 땅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을 거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여말선초의 토지 소유를 둘러싸고 일어난 격변기에
비교적 온전히 살아 남아 이어진 지역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필자는 영남땅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사토지대장을 불태우다
고려사 1390년 09월 미상 (음)
공양왕(恭讓王) 2년(1390) 9월 공(公)·사(私)의 토지대장[田籍]을 시가(市街)에서 불태우니,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조종(祖宗)이 만드신 사전(私田)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없어졌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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