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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전근대 농업 주력으로서의 화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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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식 작가 반응이 궁금하다. 바오밥나무 숲을 태우니 말이다.

 
한반도 농업 흐름을 짚는 글을 신동훈 교수께서 집요하게 이곳에서 쓰거니와, 

그 흐름을 대별하면 전근대 한반도는 잡곡 중심이었으며,

벼농사라 해 봐야 주력이 아니었고, 그나마 한반도 남부 일대나 도작문화라 할 만한 지점이라는 골자로 나는 이해하거니와 

물론 그 전공답게 벼농사가 한반도에서 비롯하는 통로라는 관점에서 그것이 어디를 통해 들어왔고, 그것이 언제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로 연결되었는지도 주시한다고 보거니와 

요컨대 저 잡곡농경이라는 말 말이다, 그 점과 관련해, 또 꼭 저 문제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하는 문제가 바로 화전이다.

산이나 수풀에다 불을 질러 농경을 하는 그 농업 형태가 너무 쉽게 간과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반도처럼 산이 많은 데서 잡곡농경, 그 주력을 나는 우리가 지금 보는 그런 밭이 아니라 화전으로 본다. 

물론 화전이라는 말은 이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은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말뿐이다.

말뿐이니 누구나 아는 문제를 왜 새삼 이야기하느냐는 핀잔이 있을 뿐이다. 
 

태운 숲엔 종자를 뿌리고

 
그렇다면 벼농사는 논농사인데,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농업사라 하면 매양 논만 떠들고 자빠졌는가? 이는 분명 형용모순이다. 

저 화전 문제를 천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 화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놀랍게도 박정희 시대였다.

그때 산불방지 산림녹화를 위해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남은 화전민들을 강제로 몰아냈다.

그 몰아낸 화전민 일부는 인천으로 이주했으며 현지에 남은 일부는 우리가 아는 그 농업인 혹은 펜션 운영하는 사람들로 전향했다. 

밭? 이 밭 하나 일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나처럼 깡촌 산촌에서 태어나고 비록 엄마 아부지한테 개끌리듯 끌려다니며 아동 노동에 혹사당하기는 했지만,

그런 경험에서 비춰보면 농사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며, 그 일환으로 밭뙤기 하나 이루는 일이 얼마나 고통인지 안다. 

텃밭이니 주말농장이니 해서 잠깐 흉내내는 친구들이야 밭뙤기 농사가 낙일 수 있고 레저일 수 있겠지만

그 자갈밭이라도 하나 밭뙤기로 만들어야 콩이라도 한 말, 강냉이라도 한 말 거두어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사람이 부지기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런 그들한테 국가는 때마다 세깅을 매겼고,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뜯어갔다.

인두세라 해서 사람 숫자대로 세금을 거둬가고 땅 주인이라 해서 소출 절반을 가져가는 그런 고난하고 질긴 삶이었다. 

지금 농촌에 버려진 밭은 모조리 묵정밭이 되었고, 비운 집조차 1년만 지나면 묵정밭이다.

자연이란 본래 그토록 무서워서 그 잡풀더미를 보면 기가 찬다. 
 

한 방에 잡풀 제거

 
그런 잡풀더미를 일거에 밭으로 만들어주는 도구가 화전이다.

그냥 불싸 질러 버리고 그에서 나온 재를 거름삼아 이랑 만들어 잡곡 뿌리는 농업이 화전이다. 

이 화전 유습이 그대로 남아 논두렁태우기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거의 목숨이 끊어졌다. 

한국문화사에서 화전이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그 화전의 양상을 제대로 보려거든 이제는 동남아 라오스 산촌을 가야 한다.

내가 농업사를 한다면, 내가 적어도 고고학으로 밥 빌어먹고 농업사로 먹고 산다 자처한다면, 동남아 어디 도자기촌 가서 토기 만드는 일 흉내낼 일이 아니라

적어도 1년은 넘게 그 산촌으로 들어가 그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산에다가 불을 싸지르고 그렇게 싸지른 땅에다가 잡곡을 뿌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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