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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천안 천흥사論] (1) 만남의광장 봉선홍경사와 톨게이트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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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191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천흥사지天興寺址라는 절터가 외부로 알려진 동기를 보면 첫째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두 문화유산, 곧 천흥사지 오층석탑천흥사지 당간지주, 둘째 제자리를 떠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천흥사지 동종 크게 두 종류로 말미암는다.


은정이가 홀라당 까디빈 천흥사지. 뒤편 방죽이 성거산 기슭을 막은 천흥1저수지의 그것이다. 추정 강당터에서 전면 금당 및 석탑을 봤다.

 

 

전자 석탑과 당간지주는 이곳에 절터가 있었음을 웅변하며, 아울러 그 분포양상을 대략 짐작케 하는 반면, 후자는 천흥사라는 절과 그 동종을 만든 내력을 짐작케 하거나 알려준다. 전자는 꼭 석탑과 당간지주가 아니래 해도, 이번 발굴조사 이전까지 과수원으로 변한 주변으로 이 일대 어느 시기에 절과 같은 대규모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각종 흔적이 농후하게 발견됐다.

 

직산 천흥사 일대와 영호남로. 저짝에서 갈라지고 만났다.

 

여타 옛날 절이 그렇듯이 천흥사 역시 그 정확한 조성 시점과 내력이 그리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후대 문헌기록이 더러 산발하니, 이들을 종합해 대략 천흥사는 고려 태조 왕건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으며, 따라서 그 창건 역시 그 무렵 왕건 집권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근자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그 추정이 크게 어긋나지 않음을 알려준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지금은 그 지리 정보를 이야기할 적에 대뜸 천흥사지라 하면 천안을 떠올리지만, 특히 천흥사를 생각할 적에는 천안天安은 떼어버리고 실은 직산稷山이라는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직산이 지금은 천안시 소속 하위 행정단위 중 하나인 직산읍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봉선홍경사와 성거산 자락 천흥사

 

이 직산은 한반도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지금의 개경 혹은 서울이 도읍이 된 고려~조선시대에 지닌 톡득한 위상으로 빠뜨리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으니, 이를 기점으로 바로 영남과 호남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개경 혹은 서울을 출발한 사람들이 두 지역을 갈 적에 직산까지는 같은 도로를 이용하다가 예서 빠이빠이 했다. 이는 반대로 영남과 호남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은 직산에서 hi buddy 하면서 반갑게 악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산 혹은 그 주변을 포괄한 지역이 지닌 중대성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이 일대에 천흥사 외에도 그 북쪽에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고속도로휴게소 겸 국영모텔이 있은 까닭이기도 하다. 봉선奉先이란 선조를 받든다는 뜻이니, 이 경우 선조는 고려왕조 왕통을 말한다. 홍경弘慶이란 그런 왕통에서 말미암아 신민들이 크나큰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현재의 천안시 행정구역과 직산

 

결국 봉선홍경사는 고속도로휴게소요 국립호텔이면서 국가 종묘의 브랜치다. 불교가 절대의 정신흐름으로 지배한 고려왕조에서는 주요 길목마다 불상을 안치한 휴게소를 설치하고는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 왕래객들한테 삥을 뜯었으니 지금의 톨게이트비가 그때라고 왜 없었겠는가?

 

이런 주요 거점마다 국가와 왕실을 생각하는 사당도 아울러 만들어 하시라도 국가와 왕실의 음덕을 잊지 말아야 함을 강요했으니, 그리하여 그런 휴게소 겸 노변 국영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왕건을 추모추념해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때라고 왜 없었겠는가?

 

천흥사와 주변 산세. 영남 쪽으로 가려면 해발 500미터 안팎인 저 산맥을 관통해야 한다. 왜 천흥사가 저짝에 자리를 잡았는가? 톨게이트비 징수를 위해서였다.

 

홍경원弘慶院을 일러 신증新增 권 제16 충청도忠淸道 직산현稷山縣에서 논하기를 고을, 곧 직산현치 기준 북쪽 15리에 있다 하면서


고려 현종顯宗이 이곳이 갈래길 요충要衝인 데다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를 만나므로 승려 형긍逈兢한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했거니와, 그리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완공하니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더불어 절 서쪽에다가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한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했다.


봉선홍경사 갈기비. 삐딱이 거북

 

 

결국 홍경사는 크게 사찰이라는 신성 구역, 모텔이라는 속세 구역 둘로 분절했음을 엿보거니와, 그 배치 양상은 전자를 동쪽, 후자를 서쪽에 배치했음을 엿본다. 이것이 일반적인 고려시대 절-모텔 세트형 건축물 배치인지는 다른 사례를 검출해야겠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홍경사와 통화원

 

 

홍경사에다가 굳이 봉선奉先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앞서 말했거니와, 그렇다면 왜 통화원에다가 광연廣緣이라는 말을 붙였는지도 우리는 아울러 짐작한다. 글자 그대로다. 인연을 넓히는 곳이라는 의미, 곧 이곳이 낯선 사람끼리 만나는 곳이라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안다. 간단히 말해 통화원은 '만남의광장'이었다.


유채밭으로 변한 홍경사 주변

 

 

신증에 홍경사를 소재로 하는 고려시대 지식인 시가 두어 수 인용된 까닭이 이에서 말미암는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되니 감흥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색李穡도 관련 시를 남겼고, 이첨李詹 역시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 “말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는 딩가딩가 하는 한 편을 읊었다.


노출한 천흥사지. 천흥사라는 간판을 달고 출범한 신층 사찰. 언제 생긴겨?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소속을 박아놨다. 저 석축 조성에 들어간 돌은 어디서 가져온겨?

 

 

서울 혹은 개경 기준으로 남하하는 사람들은 봉선홍경사에서 하루를 유숙하고는 길을 재촉하다가 이내 영남과 호남길로 갈라졌으니 천흥사가 지닌 중대성은 역시 봉선홍경사라랑 다른 바가 하등 없다. 이곳 역시 휴게소요 사찰이며 국영호텔이었고 아울러 종묘의 브랜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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