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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김해 양동리의 세발 청동솥은 어디다 썼는가?

by taeshik.kim 2019.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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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이 2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한 <가야본성> 특별전에도 출품된 모양이라, 그 간략한 약보는 다음과 같다. 


청동세발솥靑銅鼎 

Bronze Tripod Cauldron 

기원전 1세기(제작), 3세기(무덤) 

김해 양동리 322호묘 

높이 17.4㎝ 

국립김해박물관


그러면서 이 전시도록은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고 있던 가락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입니다. 입술 부분에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西□官鼎, 容一斗, 幷重十七斤 七兩, 七”이며, "서○궁에서 사용하는 솥으로 용량은 1말이며, 무게는 17근 7량 7(돈)"으로 풀이됩니다. 몸통에는 땜질한 흔적이 보이는데, 아마도 오랜 기간 사용하여 파손된 것을 수리해 쓰다가 묻었다고 추정합니다. 


이 유물 시기를 "기원전 1세기(제작), 3세기(무덤)"라고 두 가지로 적은 까닭은 유물 자체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을 묻은 무덤은 서기 3세기 무렵에 만든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 무덤이 김해 양동리 322호묘라는 데다. 


그렇다면 제작지는 어디인가? 한반도에서는 이질적이지만, 중국 대륙에서는 흔해서 수입품으로 본다. 다시 말해 이 청동 세발솥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중국에 제작되었다가, 어느 시기엔가 한반도로 건너와서 김해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서 문제는 언제 한반도로 건너왔으며, 그것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단서는 있는가? 없다!!!! 


언제 건너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전연 없다. 저에는 사용하다가 파손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했거니와, 그 파손 사용 흔적이 중국에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인지도 알 수가 없다. 


중고품이 훨씬 나중에 한반도로 넘어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신안선 동전 봐라. 동시대 동전만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 각종 동전을 바리바리 싸다 놨다. 


그것이 한반도로 오게 된 시점, 그리고 그것의 전래 사정이 매우 중대한데, 그에 대한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 


이 유물은 워낙에나 유명해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펴낸 《고고학사전》에는 아래와 같은 표제 항목 아래다가 이렇게 설명한다. 


양동리 322호묘 곡구궁명 동정(金海 良洞里322號墓 谷口宮銘銅鼎)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 3 일대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 제322호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에서 출토된 명문이 있는 동정(銅鼎)이다. 전형적인 한대(漢代) 동정으로 전체적 형태는 반구형(半球形)이며, 동체의 중상위에 1조의 돌선(突線)이 둘러져 있다. 높이 17.5㎝, 구경(口徑) 16.1㎝ 정도의 크기이다. 이부(耳部)는 구연 아래에 대칭으로 부착되어 있으며 형태는 하단이 거의 수평으로 돌출하다가 다시 수직으로 상향하고 있다. 이부의 상단은 최종적으로 짧게 외반하고 있다. 정족(鼎足)은 정(鼎)의 동체 하위에 세 개가 거의 등간격으로 부착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수족(獸足) 형태를 취하고 있다. 뚜껑받이턱은 2단으로 형성되어 원래 동일 재질의 정개(鼎蓋)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연과 돌선 중간 부위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西□官鼎, 容一斗, 幷重十七斤 七兩, 七”로 판독된다. 정(鼎)의 출산지 혹은 제작지로 추정되는 글자와 용량을 구체적으로 기재해 놓았다. 명문의 자체는 한 대 전서체에 해당하는데, 이 중 두 번째 글자인 “西”자(字) 다음의 글자가 선명하지 못해 구체적인 판독에 여러 논의가 개진되고 있다. 예로 이학근은 “西□銅鼎, 容一斗, 幷蓋重十一斤 第七”로 판독하여 “西”와 그 다음자를 연결하여 지명으로 추정하였고 “幷”과 “重”의 사이에 “蓋”자가 추가로 각서(刻書) 되어 정개(鼎蓋)의 중량을 표시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기원전·후에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3세기 전반의 무덤인 양동리 322호묘에 부장된 점과 동체부 저면의 땜질 흔적 등으로 보아 전세된 유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출토된 유일한 명문 동정이며 당시 중국과 변한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조윤재)



참고문헌

한반도 출토 (청동)鼎의 성격(정인성, 고문화 48,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96), 김해 양동리고분문화(임효택·곽동철, 동의대학교 박물관, 2000)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생김새가 어떠한지 그걸 기술하는 데다가 분량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저 생김새 기술이 필요한가? 없다. 그건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사전에 필요한 항목은 아니다. 


저 긴 기술 중 "국내에서 출토된 유일한 명문 동정이며 당시 중국과 변한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이라는 이 평가만이 오직 가치를 지니는데, 문제는 "중국과 변한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이라 했지만,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전연 부연을 하지 않았다. 왜 중요한데? 단순히 중국 것이 와서???? 


그렇다면 내가 보는 이 유물은 어떤 점을 파고 들어야 하는가?


저걸 어디다 썼는가다. 어디다 뭐할 때 썼는가다. 


이걸 아무도 묻지 않는다. 발굴된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갈 텐데 아무도 기능을 묻지 않는다. 몰라서? 모르면 모른다 해야지 않겠는가?


장터국밥 끓일 때 사용했는가? 아니면 부엌 아궁이데가 밥 하려고 사용했는가? 


실제 사용한 것이라 추정했는데, 바닥은 조사를 했는지 보고서를 보지 않아 모르겠다만,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발굴 직후 조사를 했는가? 아마 안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했는데 안했다고 했다면 말이다. 


뭐 이럴 때마다 한국고고학이 전가의 보물로 삼는 말이 있기는 하다. 제기다! 제사지낼 때 썼다. 지들이 모르면 제기다. 


암튼 이 유물에서 가장 중대한 점은 기능이다! 대체 무엇에다가 저 청동솥을 사용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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